사후20년만에 밝혀진 함대정화백의 생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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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l950년대에 활약유화가 함대정씨의 미궁에 싸였던 생애와 작품활동 상황이 사후20년만에 밝혀졌다.
50년부터 화필을 잡기시작하자 곧 대한미협상을 받고 또 「파리」유학을 하는 등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함씨는 59년 39세로 요절했는데 고향이 평북인데다 화우가 별로없었고 유작마저 일산돼 그의 존재가 오리무중에 싸여있었다.
50년대는 동란직후의 혼란기. 이중섭·이인성씨등 좋은 화가들이 있었지만 사회가 그들을 돌보지 못하던 시기다.
지난해 가을 태인화랑에서 몇점의 작품을 수습해 전시회를 연것이 망각속의 한 화가에 관심을 불어넣은 최초의 유작전. 그런데도 생애에 관해서는 전혀알려지지 않았는데 최근 함씨의 작가생활을 뒷바라지했던 후원자가 밝혀져 그의 전모가 드러났다.
화단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이 화제의 주인공은 사업을 하다 은퇴한 박기훈씨 (65·서울대신동). 함씨의 고향 선배로서 중국망명생활을 함께 했고 귀국후 한때 거처를 마련해주는 한편 유학까지 주선한 장본인이다.
박씨의 증언에 따르면 함화백은 l920년 평북박천읍에서 3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신의주동중학을 거쳐 일본 중앙대경제학부에 입학했으나 학병동원을 피해 중국서주로 건너갔다. 당시 서주에 사는 한국인 친목단체인 협려산업주식회사에서 일했으며 2차대전이 끝나자 46년귀국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함씨가 그림을 그리기시작한 것은 30세가 넘어서였다. 그는 해방후 타고난 노래솜씨 때문에 가수가 될까 생각한적도 있으나 우연히 50년부터 그림에 몰두하게 됐다.
그는 동란중 대구 부산으로 전전했다.
이 기간이 작가 수업의 초기임에도 매우 열의에 차있었다 (박고석씨의 말) .
함씨는 그전에 그림을 그린일이 없건만 불과 화업3년만에 대구USIS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의 풍경들은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구도였으며 화폭의 하늘도 푸르게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서구의 야수파경향을 다분히 받아들였으며. 특히 54년 서울USIS의 2회째 개인전에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는 국전에 처음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55년 대한미협전에 응모해 최고의 협회장상을 받았다. 그리고 56년 3번째 개인전을 갖고 도불의 꿈에 사로잡혀 57년 渡佛展과동시에 「파리」로 떠났다. 그의 도불은 박씨를 비롯해 금세영 황중희씨등 고향의 친지들이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줬고 함태영부통령이 여권절차를 도왔다.
그는 「파리」에서 l년여를머 무르는동안 그곳의 추상운동에 자극돼 반추상으로 전향했다. 그의 단간방「아파트」는 50호의 작품을 제작할 수 없도록 비좁았지만 당시 「파리」에 신축된 모 예술인회합장소에 5백호의 벽화를 제작, 기념작을 남겼지만 현존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함씨는 59년초에 일시귀국해 체불전을 가졌다. 결혼도 하고 다시 건너갈 생각이었는데 그해10월갑작스런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화업8∼9년에 5회의 개인전을 가질만큼 재능있는 경력적인 작가. 적어도 1백50점이상 남겼을 것으로 추산되나 현재까지 확인된것은 20점미만이다.
그의 동생도 월남했지만 그리 왕래하지 않고 끝내 독신생활을 하는 괴팍한 성격이었다.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을뿐더러 화단에 번잡하게 교류하지도 않았다.
그는 특별한 화론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작가가 정신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해야한다』 는 지론에 철저했다. 당시 한국화단의 풍조 그대로 침울한 화면을 보였으나 「스케일」이 크고 진지했다.
『비록 작품세계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50년대 한국화단에서 인상에 남는 천재적 작가임에 틀림없다. 단기간에 탁월한 변모를 보여줬는데 좀더 살았더라면하는 아까운 작가다』 (권옥연씨의 말) .
함학백은 한국화단에선 보기드물게 숨은 후원자에의 해 작가 수업을 했던 행운아다. 동란전후의 어려운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그의 작가적 자세와 역량은 앞으로 새로운 각광이 비쳐져 재평가 될것으로 보인다.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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