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금삼의 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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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l954년 봄, 연극 『유유부인』공연을 전후하여 나에겐 놀랄만한 세가지 일이 생겼다. 이세가지 일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 하나는 초대 예술원 회원에 피선된 것이고 둘째는 제4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 것이요, 세번째는 미국무성의 방미초청을 받은 것 등이다.
52년8월 문화보호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예술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할 목적으로 예술원이 설립됐다. 이를 위해 당국은 문화인등록을 서둘렀고 이에 따라 4백43명의 문화인이 탄생됐다. 1954년 3월, 예술원회원은 이들 문화인 4백43명의 투표에 의해 25명의 회원이 선출됐다.
예술원초대회장에는 고희동, 부회장은 박종화였고 문학·음악·미술·연극 4개부문에 석순원·김동리·조연현, 현제명·김성태·성경린, 장발등이 초대회원으로 피선됐다.
또 그해 서울시 문화상수장자는 모두 10명이었는데 연예부문에는 영화에 윤봉춘, 음악에 김생려, 그리고 연극에서 내가 영광을 안았다. 여기에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미국무성의 미국초청은 나를 한동안 어리둥절케 했다.
이런 개인적인 변화 속에서도 연극은 계속됐다. 54년 『자유부인』의 대성공에 뒤이어 『이슬』(6월) 『인보지간』 (9월) 『자매』 (11월) 등을 연달아 공연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연극이 차차 영화에 위축을 당해가던 때라 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 것이 인기소설의 연극화였다. 이미 『자유부인』에서 한차례 재미를 보았던 경험이 있던터라 명작소설을 물색하게 됐다.
여기서 선정된 것이 박종화원작의 『금삼의 피』였다.
연산군의 얘기를 담은 『금삼의 피』는 박종화소설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명작이다.
『금삼의 피』는 훌륭한 원작에 힘입어 연극으로도 크게 성공을 거두어 오랜만에 푸짐한 흥행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연극은「동경학생예술좌」출신인 박동근이 연출을 맡았었는데 박동근으로서는 해방 뒤 첫 연출이었다. 박동근은 나보다 2년 선배로「학생예술좌」시절엔 주영섭과 함께 「학생설술좌」의「리더」로 활약한 연극인이었다.
연기전문을 거쳐 일본법공대학영문과를 졸업한 재사였다.
일본서 귀국한뒤 「학생예술좌」관계로 한때 수노경찰서에 구속됐으며 석방된 뒤에는 연극에서 손을 떼고 서울영등포구청서 공무원으로 잠시 있었으며 해방뒤엔 모고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가 『연극인이 연극을 떠나 있으면 되겠느냐』고 권유, 연출을 맡게됐다.
박동근으로는 20여년만에 처음맡는 연극 연출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동경학생시절 박동근연출답지않게 연출이 예리하지 못하고 무뎌 있었다.
더군다나 「신협」은 직업극단으로 관객의 반응에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에 학생연극과는 달리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동경시절의 박동근은 극리논·극작·연출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적 연극학도였는데 20여년만에 접한 박동근의 연출력은 그때와는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 있었다.
재능도 개발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녹이 스는 모양이라고 그를 아는 이들은 그의 탁월했던 재능을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협」단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금삼의 피』는 큰 성공을 거둔것이다.
박동근은 그뒤 『계월향』이란 연극에 한번 더 연출을 했으나 역시 뚜렷한 연출력을 발휘치 못하고 연극을 떠나고 말았다.
박동근은 그뒤「라디오」「드라머」연출에 한동안 종사하기도 했었다.
나의 미국행은 그동안 모든 절차가 끝나 『금삼의 피』공연이 끝난뒤인 55년 3월 출국하게 됐다.
미국행은 일본유학시절 일본여행을 빼고는 첫 해외나들이었다.
미국무성 초청은 소설가 김말봉씨와 나와 두 사람이었는데 출국도 따로따로 했고 미국에서의「스케줄」도 각각 달라 나는 주로 연극관계만 시찰을 했다.
초청기간은 3개월이었고 이때 둘러본 미연극계에서 나는 새로 느끼고 배운것이 많아 미국서 보고 배운 연극얘기를 잠시 곁들일까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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