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397)|극단 「신협」(제61화)|햄리트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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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신협」이 안정되어 이만하면 신작공연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을 갖고 막을 올린 것이 『햄리트』였다.
1951년9월에 막을 올린 『햄리트』는 「신협」의 한 기념비적공연이었다. 1주일간의 낮·밤 공연이 모두 만원, 대성황을 이루었다.
『햄리트』는 유치진선생이 윤색했는데 첫 장면을 원극의 1막2장 왕의 대관식 장면에서부터 시작했다. 막이 열리면서 그 화려한 대관식 장면의 황홀한 무대에 관객들은 그대로 압도당해 끌려들었고 매료됐다.
이것이 극적 흐름을 아주 강력하게 했으며 이렇게 적절히 윤색한 것이 공연 성공의 한 이유가 되었다. 『햄리트』는 「신협」에서 가진 나의 세번째 연출 작품이기도한데, 나는 해방뒤 중앙대에서 공연한 『햄리트』를 한번 연출한 경험이 있어 그것이 퍽 도움이 됐었다. 중앙대 『햄리트』에선 당시 재학중이던 최무룡·박대숙 (여류극작가)이 주역을 맡았었다. 명동 시공관에서 공연했는데 대학극으로는 흔치않게 연장공연을 갖는등 그때도 대단히 성공을 거둔 공연이었다.
「신협」의 『햄리트』에선 김동원이 「햄리트」, 극단 「신협」출신의 김복자가 「오필리어」, 황정순이 왕비, 박상익이 「오필리어」의 아버지, 그리고 내가 연출을 보면서 「클로디어스」왕역으로 분했다.『햄리트』는 주인공의 회의적이고 사색적이고 우유부단한 성격이 진하게 깔려 있는 작품인데, 그 성격을 그대로 가져가면 연극이 박력이 없을 것 같아 나는 연출방향을 다른 각도로 약간 바꾸기로 했다. 즉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불타는 복수의 정열을 강조해야겠다고 생각, 극의 흐름을 「햄리트」의 정신적 갈등을 극적 긴장속으로 압축해 표현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는데 이런 연출 의도가 잘 전달되어 성공에 한 도움이 됐다.
그런데『햄리트』의 첫날 낮공연은 엉망이었다. 막을 올리니까 관객이 손으로 셀 정도로 몇명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공연을 끝내고 분장실로 모인 단원들의 분위기는 무덤같이 침울했다. 나는 무슨 결함이 있다고 판단, 그 결함을 찾기 위해 책읽기를 다시하자고 권유했다. 코피를 쏟은 김동원이 반대했지만 내가 『그래도 해야한다』고 우겨 소금을 섞은 주먹밥을 먹으면서 책읽기를 새로 시작했다. 연기자들에게 연출자의 극적 사상과 정서를 바람직하게 전달·주입·반영·해석시키는 데는 책읽기가 가장 적절한 조치다.
단원들이 분발하여 책읽기를 해 연극을 다시 한번 정리한 것이 큰 도움이 되어 그 뒤부터의 공연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책읽기의 중요성을 실감한 나는 그 뒤부터는 종합연습을 끝내고 공연첫날 전엔 꼭 다시 한번 책읽기를 하는 습관이 들었다.
『햄리트』는 지방공연에선 물론 그 뒤 서울에서의 재공연때도 다시 한번 큰 성공을 거두어 새로운 「신협」의 「달러·박스」가 됐다.
『햄리트』성공에 힘입은「신협」은 「세익스피어」작품에 입맛을 들였다. 그래서 그의 4대 비극을 모두 공연하려고 했다. 이 계획에 따라 등장한 것이 『햄리트』공연 1개월 뒤에 막을 올린 『맥베드』였다. 이것도 나의 연출이었다. 그러나 막연히 「셰익스피어」작품에만 매달렸을뿐 『맥배드』에 대한 연구나 충분한 준비가 없어 이 작품은 실패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맥베드』엔 미묘한 환상 장면과 마녀들이 등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당시 피난지에서의 시설로는 효과를 살릴수가 없었다.
「맥베드』의 뒤를 이은것이 12월에 공연된「사르트르」 원작의「붉은 장갑』이었다. 김광주가 번역했는데 내용이 좋았다.
그러나 내용이 공산주의 이야기라 해서 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당시 공보처 차관이던 이헌구를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 대신 끝부분을 약간 수정키로했다.
당시 전쟁통의 피난지 지식인들은 외부 세계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전후 새로운 작가의 작품은 광장히 큰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이 연극은 그래서 대단한 성공을 했다.
전쟁시기에 「이데올로기」를 떠난 이런 작가의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는것은 큰 의의가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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