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당금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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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하루는 「세븐·클럽」「멤버」들이 나에게 찾아 와선 『A급을 제외한 나머지 배당「리스트」를 우리가 새로 짜겠다』고 요구해왔다.
나는 얼토당토 않은 주문이라 일언지하에 안된다고 거절했다. 나의 확고한 반대에 「세븐·클럽」이 주장했던 『새 배당「리스트」』건은 한동안 잠잠해졌다. 그래서 그 문제는 일단락이 난것으로 생각했다.
처자가 부산에 있는 나는 공언 틈틈이 부산엘 갔다.
그 날도 공연이 쉬게되어 나는 가족을 만나러 며칠간 부산엘 갔다. 그런데 부산엘 다녀오니 극단 분위기가 이상했다. 당시 단원들은 「키네마」극장 분장실에서 먹고 자고 하는 자취생활을 했는데 저녁에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워서 보니 천장에 웬 총알자국이 나 있었다.
「문예중대」소속이었던 「신협」단원들은 그 때 모두가 군에서 지급한 총 한자루씩을 갖고 있었다. 『저게 무슨 총 자국이냐?』고 놀라서 단원들에게 물었더니 모두들 쉬쉬하고 입들을 열지 않으려 했다.
한동안 추궁를 하니 『박경주씨가 화가 나서 총을 쏘았다』는 것이었다.
사연을 마지고 보니 박경주가 화가 날만도 했다.
즉 내가 없는 사이에 「세븐·클럽」의 젊은 친구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배당「리스트」를 새로 짰는데, 그 내용인즉 지금까지 A급이던 사람들은 「A'」란 것으로 격상하고 A급을 새로 신설했는데 유독 박경주만이 A급에서 A'로 승급하지 못하고 그대로 A급에 넣어 두었다는 것이다.
평소 성격이 원만하고 참을성이 많았던 박경주였는데 「세븐·클럽」에서 일방적으로 봉급을 조정했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결국 박경주는 이 소동에 불쾌감을 갖고 몇개월뒤 「신협」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세븐·클럽」의 젊은이들에게 단단히 따지고 들었다.
『일에 대한 정열과 개혁정신은 이해가 가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질 능력이 없는 이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느냐』고 말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고 개혁만 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라고 힐책했다. 이 배당문제에 있어서는 연출을 맡았던 허석의 불만도 대단했다. 즉 연출은 한 작품에 대해 연출료만 지불하면 그뿐, 같은 작품으로 지방공연을 갈 때는 따로 연출료가 없었다. 여기에 대해 허석은 『이진정은 같은 연출가이면서도 공연할 때마다 배당금을 받으니 평형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허석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이진정은 대구「키네마」시절 연출도 않으면서 공연때마다 배당을 받아 그 수입이 허석과는 비교도 안되게 많았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이진정도 얼마뒤 「신협」을 떠났다.
대구시절 극장공연은 공연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피난시기 관객들의 성향을 분석해보면 연극흥행이 잘 되게 되어있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갈곳이 없었다. 세든 피난민들은 거리로 몰려 나왔고, 거리에 나와서도 마땅히 갈곳이 없어 자연 극장으로 몰려들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그때는 극강에서 무엇을 하든간에 대만원이었다.
정원의 3∼4배씩이나 몰려든 관객앞에서 연극을 하자니 연기인들은 자연 연기의 무리가 뒤따라야 했다. 성대를 높여야 하고 연기가 과장됐다.
이즈음 복혜숙·서월영씨도 「신협」의 한 「멤버」로 함께 피난하여 「신협」무대에 섰었다.
두 사람 모두 연극계의 원로들.
그러나 복·서씨도 「신협」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극단을 떠났다. 두 사람은 그동안 연극보다는 영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대를 오래 떠나있었고 영화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무대에서 단련됐던 연극적인 감각이 많이 둔화돼 있었다.
연극적인 감각뿐 아니라 성량도 영화에 맞게 변화돼 있어 그 북새통의 관객 앞에서 큰 소리를 내야하는 연기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연극「컴백」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다시 영화계로 돌아가 그쪽에서 연기의 열매를 맺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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