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치하의 연극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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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수복 소식을 듣고 행장을 꾸렸다. 부산에서 해군함정을 타고 3일인가 4일 걸려서 인천엘 닿았다. 서울에 들어오니 처자도, 그리고 대부분의 연극인들도 모두 무사했다.
아내는 납치가 두려워 줄곧 인사동 할머니댁에 피신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이화삼과 김동원이 납치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내 가장 가까왔던 두 친구가 괴뢰군에 의해 북으로 몰려갔다는 소식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었다. 하루는 국립극장에 출근하는 길에 김동원의 부인을 만났다.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호소했는데 지금도 그때 부인의 절망적인 표정이 생생히 기억된다.
이밖에 김선영·박민천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월북했고 박상익은 벌써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군위문대로 평양에 가 있었다.
적치하 3개월간의 국립극장시설은 엉망이 됐다. 조명·효과시설등, 중요한 기재는 몽땅 북괴가 뜯어가 버렸다. 공연은 고사하고 폐허의 빈창고가 돼었었다.
서울에 남아있던 이광래·박경주들이 극단을 수습해놓고 새단원들도 많이 확보해 두었다. 그때 참여한 이들이 장민호·최무룡·김경옥·최창봉(현 문예진흥원사무총장) 등이었다.
정부가 환도를 했지만 전쟁의 북새통에 국립극장에 대해선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특히 극장장인 유치진선생은 전쟁의 충격때문에 극단의 진로에 대해 뚜렷한 「비전」을 밝히지 못했다. 결국 자립적인 행동으로 연극을 계속할 수밖엔 없었는데 그래서 탄생된 것이 김영수 원작의 『혈맥』이었다. 『혈맥』은 사변전 『신청년』이란 극단에서 공연되어 크게 성공한 작품이었다. 국도극장으로 무대를 잡고 연습을 시작했다.
한참 연습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납치됐던 김동원이 불쑥 서울에 나타났다. 평양을 훨씬 지나 평안남도 순천까지 끌려갔다가 UN기의 폭격틈에 대열에서 빠져나와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사지에서 살아온 반가운 친구와의 극적 해후였다. 그러나 또한 친구 이화삼은 오늘날까지 생사가 불명이다.
김동원은 함께 끌려가던 노역전문의 박제행이 폭격의 소란속에서 헤어졌다고 전했다.
김동원의 뒤를 이어 역시 납치됐던 김승호·최은희·양백명(문정숙의 언니 문정면<납북>의 남편)등도 탈출에 성공. 서울로 돌아왔다.
「신협」의 주역 김동원이 나타나자 단원들은 모두 반가와했는데 「신협」의 회장이었던 이광래만 김동원의 참여를 반대했다. 납치를 당했다는 그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결국 이 알력으로 이광래는 「신협」과 손을 끊고 말았다.
이광래는 경남마산출신으로 이은상과는 숙질사이. 동아일보 제1회 희곡모집에 『촌선생』이란 작품으로 당선, 극작과 연출활동을 했으며 『민예』란 극단을 만들어 운영하는등 우리나라 연극발전에 큰 공헌을 한 주인공이다. 나와는 7세인가 8세 위인 대선배다.
그가 「신협」을 떠나자 극단은 잠시 운영에 질이 왔다. 사실 연기인들이란 무대위에서만 빛을 발했을 뿐, 극단이란 큰 덩어리를 이끌어 가는데는 큰 능력이 없었다.
극단운영에는 거기에 맞는 안목을 가진 이가 필요한데 연기자들은 그런 점엔 능력이 약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윤방일을 만났다. 윤방일은 그때 문교부의 한 관리였다. 연극인이 연극을 떠나 있어 되겠느냐는 이야기와 극단사정을 들려주고 함께 일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윤방일이 다시 「신협」에 돌아와 기획을 맡게됐다.
그때 주선태도 서울에 남아있었는데 그는 처음 「신협」재건에 관여하질 않으려 했다. 그는 쌀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연극하다 빨갱이한테 혼이 났는데 이제는 쌀장사나 계속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도 연극을 버리지 못하고 뒤에 다시 「신협」가족이 됐다. 아뭏든 이렁저렁 국도극장무대에 『혈맥』의 막은 올렸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혈맥』의 실패는 연습부족으로 인한 극적 「앙상블」을 이루지 못했던것이 치명적이었다. 또 하나는 『혈맥』의 내용이 해방직후 궁핍했던 서민생활의 참상을 그린것이었는데 이 주제가 또 당시의 상황과 맞질않았다.
한창 전쟁중인데 이 불행한 내용을 관객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연극이란 인생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름답게 분장된 인생을 말하는 것이지 추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극은 오히려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극속에 파묻힌 현실에 혐오감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이 도시 무대에 올려졌으니 관객들이 아름답게 보아줄리가 없었다.
동란이후 첫 연극이 참패를 당하자 「신협」은 이제 자력으로는 일어설 수가 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때 구원의 손길이 뻗친것이 육군정훈감 이선근장군(현 정비연구문화원장)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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