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보험금 알아서 줘라" … 금감원 장고 끝에 책임 회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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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험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주지 않는 것은 잘못이지만, 꼭 모두 줄 필요는 없다.’

 최근 논란이 돼온 자살보험금에 대해 금융감독원이 이렇게 애매한 결론을 내렸다. 위법이 분명하지만 지급 명령은 내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 보험사가 자체 판단에 따라 지급 여부와 액수, 대상자를 결정하도록 해 ‘보험사 봐주기’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감원은 ING생명이 자살 고객의 유족 등에게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데 대해 위법이라고 결론 냈다. 금감원은 이를 근거로 26일 열리는 제재심의위원회에서 ING생명에 대해 ‘기관주의’, 임직원 4명에 대해 ‘주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법인에 49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안도 금융위원회에 건의하기로 했다. 사안의 중대성과 9개월간의 ‘장고’ 등을 감안하면 예상 밖의 경징계다.

 금감원은 또 위법 판단만 내리고 보험금 지급 명령 등 강제이행 조치는 취하지 않기로 했다. 명령이나 행정지도가 아닌 ING생명의 자체 판단에 따라 ‘미지급 보험금 지급계획을 마련하라’고 통보하기로 했다. 금감원은 다른 22개 생보사에 대해서도 ING생명에 준해 지급계획을 마련하도록 할 방침이다.

사실상 보험금 지급 대상자와 액수 결정 등을 보험사 자율에 맡긴 것이다. 이 때문에 보험사들이 약관과 보험계약 문안을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 보험금 지급 대상자 숫자와 액수를 축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금감원은 후속 조치와 관련해서도 ING생명의 보험금 지급 계획이나 추이를 지켜본 뒤에 결정하기로 하는 등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금감원은 지난해 9월 ING생명 검사 과정에서 ‘보험 가입 2년 이후 자살한 고객에게는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고 약관에 기재해놓고도 보험금 액수가 절반 이하인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지급 보험금은 총 560억원(이자 포함)이었다. 이후 24개 생보사 중 푸르덴셜생명과 라이나생명을 제외한 전 생보사가 총 1조원의 보험금을 미지급했다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잘못된 표준약관을 대부분의 생보사가 참고해 사용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생보업계에서는 “단순 실수였고 자살건수 증가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뒤늦은 지급에 반대해왔다. 반면 시민단체 등에서는 “생보사가 명백히 소비자들을 기만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2007년 “약관에 오류가 있더라도 보험금은 약관에 따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었다.

 이번 결정에 대해 금융당국 관계자는 “약관 자체에 오류가 있었고 2010년 4월 이후 약관이 수정됐다는 점 등을 감안해 경징계 결론을 내렸다”며 “또 기본적으로 보험사와 고객들 사이의 민사적 문제라 최종 판단은 법원의 몫인 만큼 당국이 지급 명령을 내릴 사안은 아니라고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민단체 등에서는 강하게 반발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금감원 명령이 나오지 않은 만큼 금융사가 사안을 축소해서 처리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며 “보험사가 명백히 잘못한 사안인데도 지급 명령을 하지 않은 것은 금감원이 금융소비자가 아닌 업계 편이라는 의미”라고 비판했다.

안 처장은 “보험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될 유족 등은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크다”며 “금감원이 책임을 법원에 미룬 셈이라 논란이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진석·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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