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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리」<제60화>|남기고싶은 이야기들<저자 황재경>|국악의 매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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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뉴욕」을 떠난 「퀸·엘리자베드」호는 나흘동안 대서양을 항해하여 영국에 닿았다.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했던 나는 그동안 「피지」섬대표 「투일로본」목사와 친구가 되었다. 예수의 사랑은 피부 색깔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통한다는것을 절감했다. 「런던」 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회의장이 있는 「버밍검」에 도착하니 전세계에서 1백29개국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전쟁후의 종교집회로서는 그 규모가 놀랄만큼 컸는데 모두들 어려운 시기를 용케도 견뎌낸 끝이라 축제 기분에 싸여 있었다.
회의에서는 전쟁중 각국의 기독교 실태에 대해 보고가 있었고, 앞으로의 주일학교 교육방향과 방법이 토의됐다. 워낙 참석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각국 대표들에게 허용된 보고시간은 3분간씩이었다. 나는 사회자의 양해를 구해 6분간 보고를 했다.
일제치하에서 조선내 5천여 교회가운데 1천2백여개소가 소위경방단본부로 쓰여졌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회와 성도들이 모진 탄압을 받았다고 보고하자 장내는 숙연해졌다. 나의 모시두루마기 차림이 각국 대표들의 눈길을 끈데다가 핍박받은 소국의 순교실태를 전해듣자 그들은 조선의 성도들과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나는 이 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뜻아니한 독지가를 만나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 세계주일학교 연합회의 부회장이었던 「헤인즈」라는 할머니가 나를 부르더니 학자금 걱정은 하지말고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나는 그 할머니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 「뉴욕」에서 시청각교육에 관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시청각 교육을 택한 것은 기독교를 널리 전도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회의가 끝난뒤 각국 대표들은 영국의 각지방을 단체관광했다. 주일학교 연합회에서 제공한 이「프로그램」은 한달간 계속됐는데 나는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고향과 무덤을 찾아 보았고 그의 회곡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또「워즈워드」의 고향도 찾았다.「에든버러」 에서는 국제음악제를 구경하기도 했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려는데 한가지 문제가 일어났다. 그 때만 해도 한국에서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편이 없어서 나는 미국을 경유하여 대서양을 건넜던 것인데 미국입국때 단수 「비자」를 얻었기 때문에 재입국 「비자」를 얻어야만 했다. 그런데 「런던」 주재 미국대사관의 영사는 재입국 「비자」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미국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이튿날 대사관을 찾아가니 영사는 의외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즉석에서 재입국사증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성직은 존경받는다.
나는 일행과 함께 다시「퀸·엘리자베드」편으로 「뉴욕」까지 되돌아 갈 수 있었다.
내일이면 「뉴욕」에 도착하는 전날 토요일 밤이었다. 선장은 선상음악회를 곁들인 만찬을 베풀었다. 그런데 음악회 「프로그램」을 보니 2부 첫머리에 내 이름이 올라져 있었다.
아마도 「피지」섬의 「투일로본」목사가 영국에서 나의 국악기연주를 듣고 신청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숨은 재주를 한번 과시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기다렸는데 사회자가 나를 중국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대로 나아가『나는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닙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왔읍니다』 면서 우리나라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가져갔던 태극기를 꺼내 세워놓고 먼저 단소 한가락을 뽑았다. 마침 몇가지 국악기를 가져간 것이 있어서 차례로 연주했다.
여객선 대식당에 초대된 1천2백여 신사·숙녀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부터의 신비로운 선율에 취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젊었을때 취미 삼아 배워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이 그처럼 환영받을 줄은 몰랐다. 악의 없는 미소가 세계 공통어이듯이 음악과 미술은 상호 이해의 지름길이 된다고 지금도 믿는다.
때문에 나는 내 자식들에게도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지키기 위해 국악기를 배우라고 권했다. 그들도 내 뜻을 받아들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난 손자녀석들도 할애비의 취미를 따라 단소나 거문고를 좋아하는걸 보면 흐뭇하기만 하다.
나는 그날 선장 음악회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아 큼직한 「케이크」한상자를 부상으로 받아 다음날 주일 예배후 조촐한 「티·파티」를 열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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