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 28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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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9·28」은 이제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6·25의 악몽이 그렇거늘 9·28쯤은 벌써 기억하고 있기엔 부담스러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득 그때의 몸서리치는 일들이 뼈저리게 실감되는 때가 있다. 공산「캄보디아」 수도「프놈펜」,「베트남」의「사이공」, 그 음산하고 죽은 도시의 풍경을 외신에서 볼때마다 우리는 28년전의 일을 어제의 일처럼 생각한다. 정말 자유의 고마움이 무엇인지를 관념이나 환상으로가 아니라 피부와 호흡으로 느끼게 해준 것이「9·28」이었다.
공산치하 3개월은 그야말로 우리에겐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그리고 각성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음모와 밀고, 독단과 강요, 죽음과 공포… 그 모든 것이 악령처럼 밤낮으로 우리를 괴롭혔다. 소위「인민재판」의「플래카드」밑에서 파리처럼 죽어 가는 목숨들,
총구 앞에 짐승처럼 쫓기는 시민들, 투옥과 학살. 그때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있어선 무슨 미명으로도 그 공산치하에서의 절망적 상황은 잊혀질 수 없다. 「유엔」군의「탱크」를 보고 환희와 눈물을 보인 것은 생명의 약동이었다.
1950년 9월25일 저녁, 공산군의 서울방위 주 저항선은 무너져 버렸다. 한국 해병대와 미군은 격전 끝에 연희 고지일대의 방어 벽을 돌파했고, 한편에선 서빙고에서도 도강, 진격을 계속했다.
27일 하오까지 국군과 미군은 서울을 거의 탈환했다. 수도의 상징인 중앙청의「돔」에 태극기가 올려진 것은 이날 상오 6시였다. 비록 미군의 지원은 받았지만, 우리 해병대의 젊은 용사들의 손에 의해 태극기가 게양된 것은 새삼 감회가 깊은 일이다.
그 무렵 우리의 방송에선「아나운서」가『서울수복 만세, 국군·「유엔」군 만세』를 목이 메어 열창했었다. 지금은 그런 감격이 하나의 추억이 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것은 생명의 절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후 28년. 오늘의 서울을 찾는 외국의 노 참전병들은 저마다 감회를 아로새기고 있다. 다만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우리는 감상이나 감회에만 잠겨있기엔 그때의 악몽들이 너무도 엄청나다. 공연히 소란한 행사를 갖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밍밍하게 지내기엔 어딘지 허전하다.
그래서인지 그 무렵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았던 팔팔한 해병장교 박정모 소위가 이제 중로의 노병이 되어 중앙청 광장에 다시 태극기를 올리는 조촐한 행사를 가졌다. 그날의 뜻을 되새기면서 그나마 허전한 마음을 달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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