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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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소실이 삶에 관한 탐구라고 해서, 혹은 인간에 관한 탐구라고 해서, 혼히 소설에서 어떤 가치기준을 끌어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삶이 어떤 구성에 의해 이룩되어 있는가,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둥등 우리가 혼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파악하게 하는, 혹은 의식화시키는 문학,본래의 기능으로 볼 때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김치수(문학평론가·외대교수)
그러한 노력이 작가쪽에서 나타나게 되면 작품이 도식화되거나 기발한 인물의 창조로 끝나게 되며, 독자쪽에서 나타나게 되면 작품이 자기소외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이에 유의하여 오늘의 소설들을 읽게되면, 소설이 옛날처럼 「드러매틱」하지도 않고 옛날과 같이 목소리도 높지 않다는 것올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송빈희의 『이 여름 빛』(월간중앙)은 대학교수인 주인공이 자신의 주변 인물과의 관계에서, 특히 대학생인 자신의 아들과의 관계에서 느끼고 있는 갈등의 현장을 다루고 있다.
그는 아들에게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하지만은 않다>며 학업에 전념할 것을 권한다. <혼란 속에 처한 인간의 무서움>때문에 <설익은 주관이나, 타인의 사상이나 언행을 자각 없이 받아들이는> 아들을 힐난한다. 여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오늘의 사회구조와 동질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여태 쌓아온 나의 생활>의 파괴를 두려워함으로써 현상유지 및 강화라는 이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가출과 함께 자신의 질서 파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현상이 그것을 유지하려는 의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기성과 젊은이라고 해도 좋고 학자와 <잡문가>라고 해도 좋을 두 분류사이에 놓여있는 <적대감>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식을 갖는데 있다.
위의 작품이 개인과 그 개인이 소속된 집단과의 관계에 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다면 오정희의 『꿈꾸는 새』 (뿌리깊은 나무)는 개인과 자아의 관계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대학교수를 남편으로 둔 주인공이 어느 소도시에서의 생활가운데서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남들보다 잘사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권력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송원희의 주인공은 「타인」들만 아니면 행복할 수 있는데 반하여 오정희의 주인공이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힘은 사라지고 헛된 정열만이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사랑인가, 성인가, 소멸인가>하는 질문을 계속하며 그 소도시의 <미로>를 헤매게 된다. 여기서 미로의 여러 단면들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내 보임으로써 <연민과 증오와 욕정과 무관심>으로 가득찬 과거의 발견에 도달하고 그것을 통해서 허무의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갈등은 수 없는 미로의 방황을 계속할 수밖에 없지만 주인공의 의식의 눈뜸은 바로 그 방황의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유재용의『황제를 닮은 사나이』 (한국문학)는「거인」아들을 가진 한 가난한 사람이 아들을 동물의 우리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이야기를 우화적인 방법으로 전개하고 있다. 옛날 같으면 뛰어난 장군이 되었을 「거인」이 오늘에는 우리 속에 갇히는 것 외에 쓸모가 없어진 이야기를 통해서 인물과 상황과의 관계를, 그리고 왕사문이라는 재산가와 거인의 아버지의 관계를 드러내준다. 그것은 곧 삶의 「알레고리」이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을 적대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있는 화자의 관점에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관점은 한승원의 『분노의 땅과 바다』(문학사상)에서도 드러난다. 우화적 수법이 아니라 사실적 수법으로 쓰인 이 작품은 적대관계에 있는 주인공 현진과 옛날 애인이면서도 지금은 남의 아내인 연희와의 재회를 동해서 두 집안 사이에 있었던 원한관계도 알고 보면 적대감만으로 대립만을 계속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이야기해준다.
아마도 오늘의 재벌급 인물들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했을 이 작품은 그러나 두 인물의 사랑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너무나 많은 사건이 이야기되고 있어서 이 작품은 예고된 대로 장편으로 발표되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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