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단 극장의 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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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마호멧」은 고아였다. 그가 세상에 나기 전 아버지는 여행 중에 죽고 어머니도 그를 낳자 세상을 떠났다.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1백살이나 된 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대상의 무리에 섞여 여행을 떠났다. 그의 반생은 낙타의 등위에서 사막을 여행하는데 보냈다.
불혹의 나이(40세)에 그는 비로소 「아라비아」의 종교개혁에 뜻을 품었다.「흑석」(신우) 이나 「젬젬의 우물」(성천)을 우상으로 섬기는 「아라비아」종교에 「마호멧」은 회의를 품은 것이다. 이단자의 고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마호멧」은 66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50번도 넘게 피를 홀리는 싸움을 해야했다. 『왼손엔 「코란」, 오른손엔 칼』이야말로 바로 그 자신의 일생이었다. 유일신인 「알라」를 믿는 오늘의 회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칼은 천문의 열쇠, 신을 위해 흘린 한 방울의 피, 무장으로 지샌 하룻밤, 그것은 60일의 단식이나 기도보다 낫다. 싸움터에서 넘어진 자리에선 그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의 모든 죄가 용서된다. 재판의 날이 오면 그의 상처는 진주와 같이 반짝이고, 사향과 같은 향기를 내고, 사지를 잃은 자 있으면 천사나 천동의 부름을 받을 것이다.』이것이 「마호멧」의 교훈이다.
오늘의 회교도가 「알라」신의 이름으로 모든 싸움을 성전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런 교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국민의 9할이 회교도인 「이란」의 「팔레비」왕은 1941년9월에 즉위, 63년1월부터는 백색혁명의 이름으로 토지개혁 등 근대화작업을 서둘렀다. 「이란」의 회교는 이때 많은 사원의 땅을 잃고 또 정치적 영향력도 차차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이란」의 왕정은 날로 정흡력을 강화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회교도의 눈으로는 이단처럼 보이는 신풍들이 활개를 치게된 것이다. 「이란」의 회교도들은 마치 복고를 꿈꾸듯 유흥장의 폐쇄, 엄격한 금주, 여성의 「차들」(회교도의 베일) 착용 등을 외치며 사회질서 회복운동을 폈다.
이것은 「팔레비」왕권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이란」의 회교는 「마호멧」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시야」파다. 어느 분파보다도 호전적이고 활동적이다. 「시야」파의 지도자 「아야톨리·코메이니」는 63년의 회교폭동 때 「이라크」로 망명, 더욱 극렬한 「리더」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끝내 「이란」의 석유도시 「아바단」의 한 극장에 불을 질러 무려 4백30여명의 소사자를 내는 사태까지 몰고 왔다. 『한 손엔 「코란」또 한 손엔 소련제 무기를 든』극렬 회교도의 소행이다. 「오른손의 칼」은 천국 아닌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 것이다. 「렉스」극장의 참변을 본 지하의 「마호멧」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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