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춤추는「필리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한 일본인 퇴역장교가 수백 통의 꿀벌을 배에 싣고「필리핀」에 상륙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는 상하의 나라. 여기서 양봉업을 시작하면 틀림없이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착상했던 것. 일본인의 이 기발한「아이디어」는 과연 적중하는 것 같았다. 꿀벌들은 수많은 꽃들로부터 부지런히 꿀을 모아 첫해부터 대풍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해가 지나자 이변이 생겼다. 꽃을 찾아 나선 꿀벌들이 하나같이 벌통으로 되돌아올 생각을 않고 꽃잎에 붙어 낮잠만 즐기고 있었던 것. 꿀벌들도 연중 꽃이 피어있는데서 구태여 힘들여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던 탓-.
정평 난「필리핀」사람들의 낙천적이고 향락적인 기질은 꿀벌의 일화가 말해주듯 열대성기후라는 자연조건의 혜택과 큰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필리핀」은 장장 3백년동안의 「스페인」지배, 50년에 걸친 미국의 통치, 그리고 2차 대전 때는 4년간이나 일본군에 점령됐던 어두운 역사를 지닌 나라다. 그러나「마닐라」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없다.
박화춘 씨가 납치됐던「민다나오」지방에서는 지금도 회교도 반란군과 정부군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마닐라」시의 번화가「리잘」가의 유흥업소는 저녁마다 불야성을 이루며 흥청거린다.
농촌에는 마을마다 1주일에 한번씩 어김없이 닭싸움 도박판이 벌어지고 투계 장에 모여든 농민들은 넉넉지도 못한 지갑을 몽땅 털고서야 일어서는 것이 예사다.
Singing(노래)·Sports(운동)·Sex(성)는「필리핀」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이른바 「3S」이다.
서울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행사의 하나로 열린 국제가요「페스티발」에서『노래는 아름다워라』를 불러 1등을 차지했던「하치」군도 바로「필리핀」의 인기가수다.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은「아시아」에서 이 나라를 따를 데가 없다. 이 나라에서 최고의 시청 율을 자랑하는 TV「프로」『펜트하우스 7』도 활량기 다분한 남녀 저명인사들이 출연하여 서로 어울려 신바람 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내용이다.
여기다「스포츠」열 또한 대단하다.「필리핀」의「스포츠」는 곧 농구다. 농구는 이 나라의 국기나 다름없다. 농구시합이 열리는 날이면 상가까지 철수를 한다.
왕년의 농구선수 신동파는「필리핀」에서는 지금도 신화적 존재가 돼있다.
「3S」로 요약되는「필리핀」인의 생활풍조는 낙천적인 국민성을 이용한 식민통치자들의 통치 술이 조장시킨 명예롭지 못한 유산이다.
정치에 관심을 갖거나 식민지배에 항거할 생각 말고 춤이나 추고 노래나 부르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마르코스」대통령은 게으르고 놀기만 좋아하는 국민들에게 성실과 능률을 바탕으로 한 새「모럴」을 주입시키기 위해「새 사회건설사업」을 추진중이다. 이를 위해 고안된 주민조직이 30∼50가구를 한 단위로 한「바랑가이」조직이다.「바랑가이」는「필리핀」의「새마을운동」.
그러나「필리핀」의 새 사회건설에도 고질화된 부의 편재현상이 가장 큰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고있다.
정치와 밀착된 소수의 대재벌이 주요산업을 모두 차지하고있는 것이다.「샘·뮤겔」맥주로 유명한「소리아노」재벌은 주류「콜라」「아이스크림」「버터」「치즈」등 열대지방에서는 노다지로 불리는 음료와 식품업을 거의 완전히 독점하고있다.
이런 식으로 7∼8개의 대재벌이 국부의 7O%를 차지하고 있다는 소리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가 발전한다해도 그 혜택이 일반 대중에게 돌아 갈 리가 없다는 것은 뻔한 이치다.「마닐라」가있는「루손」도마저 손으로 밥을 먹는 미개인이 원시생활을 그대로 하고있는 한편에서「마닐라」시의「미니언·에어스트리트」호화주택가에는3천∼4천 평 짜리 대지에「골프」연습장·수영장·경마장까지 별도로 갖춘 저택이 즐비하다. 한국대사관저가 있는「포베스파크」도 대표적인 호화주택가의 하나다.
부유층이 사는 호화주택 가운데는 30여명의 경비원을 고용하고 이들이 기관총까지 가지고 집을 지키는 곳도 많다. 외부사람이 이 지역을 출입하자면 무장경비원들 앞에서 손을 번쩍 치켜들고 몸수색과 신분확인을 받아야할 만큼 별세계다.'
특수층의 사치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가 반정부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필리핀」전역에는 72년이래 계엄령이 선포돼 야당이나 언론의 비판기능은 사실상 정지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낙천적인 국민들이 춤추고 노래부르는 사이에「필리핀」의 정치와 경제도 소수의 특수계층에 의해 또 다른 춤을 추고있는 것이다.
【마닐라에서 금창태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