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야구노트] 외다리 버렸다, 승짱이 살아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2006년 7월 일본에서 만난 이승엽이 인터뷰를 하다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나 같은 스타일은 나이 먹으면 못 하니까….” 이승엽 같은 스타일이 뭐냐고 묻자 그는 “힘으로 치는 스타일”이라며 씩 웃었다. 그도 나이 먹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당시 만 30세의 이승엽은 야구인생의 정점에 있었다. 전반기를 마쳤을 때 그는 양대 리그 최다 홈런(29개)을 기록 중이었고, 타율(0.323)·타점(64개)에서도 선두권을 유지했다. 또한 일본 최고 명문 요미우리의 4번타자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승엽은 오릭스(2010~2011년)를 거쳐 2012년 삼성으로 복귀했다. 그도 나이를 먹었고, 힘이 떨어졌다. 지난해 홈런 13개, 타율 0.253에 그쳤다. 그에겐 투수가 아닌, 나이가 더 벅찬 상대 같았다.

 2014년 프로 20년차, 서른아홉 살(만 38세)의 이승엽이 반등했다. 3일 현재 46경기에 나서 홈런 9개, 타율 0.297을 기록 중이다. 이대로라면 올 시즌 25~30개 정도의 홈런도 가능해 보인다.

 특히 지난주 때린 홈런 두 개는 이승엽이 ‘국민타자’로 불렸던 예전을 떠올리게 했다. 지난달 25일 넥센전 3회 오재영으로부터 터뜨린 장외홈런은 병상에 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멋진 홈런에 중계 캐스터가 흥분했고, 이 소리에 의식이 없는 이 회장이 반응한 것이다.

 지난달 28일 LG전에선 8회 왼손 마무리 봉중근으로부터 역전 3점포를 쏘아올렸다. 중요한 승부처에서 까다로운 투수를 상대로 날린, 기술적으로 완벽한 한 방이었다. 홈런 1위 넥센 박병호(21개)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는 여전히 무서운 타자라는 걸 입증했다.

 이승엽은 나이를 ‘잘 먹고’ 있다. 홈런을 다시 잘 치기 시작해서가 아니다. 나이에 맞게 생각을 바꾸고, 생각에 맞게 야구를 바꾸고 있어서다.

 2014년 이승엽의 타격 자세는 꽤 많이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폼이 작아졌다. 언뜻 봐선 큰 차이가 아닐지 몰라도 방망이 쥐는 법부터 힘을 모으고 중심이동을 하는 동작이 다 달라졌다.

 먼저 오른손을 노브(knob·방망이 밑 뭉툭한 부분) 위로 말아 쥔다. 두 손을 자유롭게 쓰게 위한 방법으로 중거리형 타자들이 선호하는 그립이다. 지난해까지는 여느 슬러거처럼 오른손 넷째와 다섯째 손가락으로 노브를 감싼 채 크게 스윙했다. 힘 모으는 동작도 콤팩트해졌다. 과거에 비해 배트를 쥔 위치(파워포지션)가 10㎝ 이상 낮아졌다. 공을 맞히는 지점까지의 거리를 줄여 정확한 스윙을 하려는 것이다.

 이승엽을 상징하는 ‘외다리 타법’도 사라졌다. 과거 이동발(왼손타자 이승엽의 오른발)을 높이 올렸다가 크게 내디뎠지만 현재는 땅에 스치듯 수평이동만 한다. 하체이동이 작으면 파워를 잃는 대신 정확성을 얻는다.

 전성기 이승엽의 폼을 보면 활시위를 세게 당겼다가 놓는 것 같았다. 힘을 잔뜩 모았다가 폭발하는 자세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지금 이승엽의 폼은 표창을 던지듯 작고 정교한 느낌이다. 겨우내 훈련을 많이 해 체중을 줄이고 순발력을 높였다. 공을 맞힐 때까지의 동작은 콤팩트하지만 허리 회전력을 강화해 나름대로 큰 타구를 만들고 있다.

 홈런타자의 말년은 대체로 초라하다. 힘과 스피드가 떨어지는데 자존심은 그대로다. 한물갔다는 말이 듣기 싫어 억지로 세게만 휘두르다 타격 밸런스가 무너진다. 그러다 가끔 대타 홈런이라도 때려 팬들의 박수로 연명한다. 스피드를 잃은 강속구 투수의 마지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승엽은 힘이 떨어지기 전 실패를 해봤다. 한·일 통산 526홈런(한국 367개, 일본 159개)을 때린 최고의 슬러거지만 일본에서 숱한 부상과 부진을 경험했고 다시 일어났다. 성공과 실패의 자산이 켜켜이 쌓인 덕분에 마흔 살을 앞둔 나이에 폼을 뜯어 고쳐가면서 자신의 브랜드를 지켜내고 있다.  

김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