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즐기면서 경제를 배우세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하도 연극~연극~하니까 아예 배우로 나서는 것으로 오해하고 데뷔를 축하한다는 인사를 하는 사람까지 있습디다. 허허."

요즘 강경식(姜慶植.67)전 부총리는 연극 얘기만 하고 다닌다. 하지만 배우로 데뷔하는 건 아니다. 그럼 혹시 원래 연극 매니어?

"젊어서 바쁘게 살다보니 연극을 본 적이 거의 없어요. 현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고."

姜전부총리의 답변이다. 그렇다면 연극 매니어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뭔가. 무대에도 객석에도 그의 자리가 없으니…. 알고 보니 그의 자리는 무대 뒤에 있었다. 바로 연극 제작자로 변신한 것이다.

姜전부총리는 24세에 행정고시에 합격, 40대에 이미 우리나라의 경제를 책임지는 재무부 장관에 올랐다.

1997년 8월에는 재정경제원 장관 겸 부총리를 맡았다가 3개월 만에 외환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치도곤'을 당하긴 했지만, 국회의원도 두 차례(14.15대)나 지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경제전문가답게 동부그룹 금융 부문을 이끌었으며 현재 직함은 고문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8일 저녁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리는 연극 '잘 해봅시다'의 팸플릿 제작자난엔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이라고 찍혀있다. '잘 해봅시다'는 노사(勞使)문제를 다룬 연극.

한 회사에서 자판기 설치를 놓고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통해 발전적인 노사관계를 정립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중견 탤런트 전원주.서학씨와 원로 연극배우 박웅씨 등이 무대에 선다.

하지만 姜전부총리가 처음부터 이렇게 '큰 판'을 구상한 것은 아니다. 그가 연극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청소년 경제교육 때문이었던 것.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선 이미 일반화된 청소년 경제교육 프로그램을 국내에도 도입해야겠다는 궁리를 하던 끝에 '경제문제에 대한 연극을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그는 연극엔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14대 때 함께 의원을 지낸 탤런트 최불암씨와 평소 친분이 있던 박은희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이들과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姜전부총리는 사회문제를 연극으로 알기 쉽게 풀어내는 TIE(Theater in Education)라는 기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대상을 청소년들로 국한시킬 게 아니라 온 국민을 상대로 민감한 경제문제를 연극으로 풀어보자'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게 됐다고 한다.

"바로 극단 섭외에 들어갔죠. 마침 지난해 극단 '모아'가 과학연극 '산소'를 훌륭하게 공연했다는 기사를 본 게 생각났습니다. 아무래도 일반극보다는 메시지가 담긴 연극을 해본 극단이 나을 것 같아 바로 연락을 했죠. 그리곤 노사문제로 연극을 한편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극단 관계자들이 노사문제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작가 안정희씨가 1년 남짓 무역회사를 다닌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10여년 전의 일.

고심 끝에 姜전부총리는 '특급 해결사'를 투입했다. 고향 후배인 최승부 전 노동부 차관을 공연의 고문 자리에 앉히고 과외를 시킨 것이다. 초고(草稿)가 나오면서부터는 姜전부총리가 직접 작가와 토론을 벌이며 대본을 고쳐나갔다.

그렇게 대본이 완성되고 본격적으로 연습하기를 한달여. 이 기간에 姜전부총리는 틈틈이 연습장을 찾아 배우들을 격려하고 자신이 주문한 재미와 의미, 그리고 공정한 시각이라는 세 가지 목표가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지켜봤다.

개막을 닷새 앞둔 지난 5일 배우들은 처음으로 공연이 열리는 교육문화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리허설을 했다. 물론 姜전부총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연습을 지켜보던 그는 "이런 민감한 사회문제를 소재로 한 연극이 흥행에 성공하면 연극계에도 또 하나의 지평이 열리는 것 아니겠느냐"며 극단 사람들을 다독거렸다.

남궁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