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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아내는 남편의 아바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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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정치인 아내 오래 하면 허리 디스크와 손가락 관절염이 절로 생긴다.” 한 은퇴 정치인의 아내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허리 굽혀 인사하고 악수했는지 얘기하며 눈물을 찍어냈다. 한 국회의원 부인의 다이어리를 본 적이 있다. ‘○○유치원 운동회’ ‘XX동 노인잔치’ 등 일정이 빼곡했다. 남편 대신 지역구의 소소한 행사를 쫓아다니는 게 일과였다. 한 지방 지역구 의원 부인은 평일엔 남편 대신 지역구를 살피는 일을 도맡았다. 주말에 남편이 내려와도 각자 더 많이 다니느라 밤에 잠깐 얼굴을 본다고도 했다.

 ‘정치인의 아내’는 독특한 장르의 일이다. 일도 많고 탈도 많고 무보수에다 무한 헌신을 요구받는데 명예는 남편 몫이다. 장려되는 건 ‘내조의 여왕’. 개성과 재능을 드러내거나 남편 위치가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순간 그는 ‘사회의 부채(負債)’로 전락한다.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내 이멜다가 마르코스 정권의 부패와 사치의 상징으로 사회 부채가 된 것처럼 말이다.

 한 카페 주인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번은 전 총리 모씨의 부인이 모임 예약을 한다며 와서 식탁·의자 배열부터 구조물과 인테리어 변경까지 온갖 지시를 하더란다. 그가 하도 위세를 부려 직원이 울음을 터뜨리는 소동을 겪고 예약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더 나아가 그 ‘진상’ 부인뿐 아니라 그 총리를 뽑았던 대통령까지 욕을 먹었다.

 우리나라는 남자 정치인의 경우 부부를 동일시하는 의식이 강고하다. 남편을 뽑으면 아내는 아바타 일꾼처럼 딸려오는 걸로 인식된다. 여성 국회의원 남편에겐 그런 기대를 안 하면서 말이다. 이번 지방 선거판에서 ‘아내는 어디 갔는지 아내 일정을 공개하라’는 게 공격 포인트가 되고, 아내의 개인 빚이 왠지 정치인 남편과 연관돼 있을 것 같은 의심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건 이렇게 부부가 분리되지 않는 문화가 너무 강해서일 거다.

 요즘 유럽에선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전 여자친구와 결별한 과정을 통해 ‘퍼스트레이디 무용론’이 제기됐다. 미국선 바람 피운 남편 옆에서 ‘착한 아내’ 코스프레를 하는 건 힐러리 이후 드물어졌다. 그런 남편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정치인의 아내들이 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정치인 아내에게 독립적 인생을 살도록 장려하는 환경으로 바뀐다면 ‘내조의 여왕’과 ‘진상’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그녀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에 신경 쓸 일도 줄지 않을까.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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