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앞에 오는 러 가스, 경제·외교 지렛대 삼을 길 찾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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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러시아가 410조원 규모의 천연가스 거래를 성사시킨 지난 21일. 러시아 국영TV 러시아투데이(RT)는 “유라시아 세기가 열리게 됐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저렴한 값에 러시아 가스를 안정적으로 들여오게 됐다”며 실리를 강조했다. 반면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은 ‘아시아 지배의 야망’이라는 제목으로 잔뜩 경계심을 드러냈다. 중·러 간 천연가스 거래 계약을 보는 눈길은 자국 입장에 따라 이처럼 중층적이다. 가스 거래는 정치·경제·외교·환경 등 다양한 변수가 조합된 고차원 방정식이다. 중·러는 10년여 치밀한 계산 끝에 ‘에너지 신동맹’이라는 방정식을 풀어냈다. 이 해법이 한국에는 정치·경제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한국에 주어진 숙제는 무엇일까.

중·러 가스 공급 계약 체결에 세계가 놀라는 건 우선 그 규모 때문이다. 중국이 공급받기로 한 가스의 양은 연간 380억㎥에 달한다. 중국 전체 소비량의 23%에 해당한다. 계약 기간도 30년으로 넉넉히 잡았다. 이번 거래를 통해 총 4000억 달러(약 410조원)의 위안화가 러시아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국제 에너지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일달러 시대가 가고 가스위안 시대가 왔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러시아는 장기적으로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에 연간 1300억㎥까지 공급을 확대할 계획이다. 지난해 러시아가 유럽에 수출한 천연가스의 양은 모두 1620억㎥. 아시아 시장이 유럽을 대체하게 되는 셈이다.

러시아 극동지역 개발 붐 예고
주목할 점은 이 가스가 신설되는 파이프라인을 타고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번 협상이 한국에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이웃한 두 거대 국가가 가스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된다는 점 때문이다. 합의문 발표 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번 합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작업은 내일 당장 시작된다”고 밝혔다. 양측은 곧장 공사에 들어가 동부 시베리아와 산둥반도를 잇는 4000㎞ 파이프라인을 2018년까지 완성할 계획이다. 인천으로부터 300여㎞ 코앞까지 러시아 가스가 관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다.

가스관이 완공되면 러시아 서부 이르쿠츠크 지역의 코빅타 가스전과 사하공화국 내 차얀다 가스전이 연결되고 여기서 생산된 천연가스가 스코보로디노와 블라고베셴스크를 거쳐 중국 하얼빈~선양~베이징~산둥으로 이어지는 가스관으로 공급된다. 영국 옥스퍼드에너지연구소 백근욱 박사는 “자원을 정치와 외교의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세계 외교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한국 정부는 코앞에 온 러시아 가스관을 정치·외교적으로 어떻게 활용할지, 한국 기업들은 55조~60조원이 투입될 가스전 및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에 어떻게 뛰어들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본지 3월 30일자 4, 5면>

한국은 이명박(MB) 정부 들어 블라디보스토크~북한 동부~속초를 잇는 이른바 블라디보스토크 파이프라인을 추진했다. 중국과 관계가 긴밀하지 않던 때라 서해라인은 논의에서 배제됐다. 오히려 중국석유총공사(CNPC) 측이 김정일 사망 직후 한국석유공사 측에 산둥과 한반도를 잇는 서해 파이프라인 건설을 제안했으나 한국 정부는 아직 답변하지 않고 있다. 백 박사는 “서해 파이프라인은 수심이 낮아 건설비용이 낮고, 일본에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데다 북핵 문제를 다룰 당근책을 쓸 수 있는 등 다목적 카드로 쓸 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더 늦기 전에 서해 파이프라인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러시아가 확보한 ‘가스위안’의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러시아는 바이칼 호수의 동쪽, 이른바 ‘극동지역’이라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야쿠츠크 개발에 눈독을 들여왔다. 극동지역은 러시아 내에서 “자원의 보고이자 21세기 아시아·태평양에 남은 마지막 개척지”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이재영 구미?유라시아 실장은 “푸틴은 극동지역을 러시아 경제성장의 모멘텀으로 삼겠다는 의중을 여러 차례 드러냈지만 철도·항만 등 기반시설이 없고 방대한 투자가 요구돼 미뤄왔다”며 “거액의 가스위안이 극동지역에 본격 투입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현 정부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강조하고 나섰지만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아직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며 “기착지 항구, 급유소, 신도시 등 극동지역 개발에 참여해 실리를 취할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동북아 천연가스 가격 하락 기대
중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대규모 천연가스 공급 계약이 한국 산업에 미칠 영향도 관심사다. 업계에서는 중국의 천연가스 수입이 장기적으로 동북아 지역의 에너지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제 에너지시장에서는 천연가스 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비싼 가격에 천연가스를 사오는 것을 ‘아시안 프리미엄’이라고 한다. 실제 멕시코만 산지 기준으로 가스 1MMBTU의 평균 가격이 4달러에 불과하지만 배에 실어 장거리 수송을 해야 하는 한국과 일본은 이보다 4.5배가량 비싼 가격으로 수입한다. 이번 계약으로 동북아 지역의 천연가스 도입처가 다양해지면서 동북아 가스 공급가격이 인하될 가능성이 커졌다.

산업 경쟁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파이프라인을 통한 천연가스(PNG)는 별도의 액화 과정이 필요 없기 때문에 액화천연가스(LNG)로 수입하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든다. 중국 기업 입장에서는 한국 기업보다 저렴한 가격에 천연가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천연가스는 대부분 석탄 대체연료로 사용되고 석탄보다는 천연가스가 여전히 비싸기 때문에 원가 경쟁력 면에서는 의미가 크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국(IEA)에 따르면 2011년 중국의 1차 에너지에서 석탄이 차지하는 비중은 68%에 달한다. 석유는 18%, 천연가스는 4%에 불과하다. 중국은 대기오염 주요 원인인 석탄 위주의 에너지 소비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석탄보일러 폐기, 천연가스 발전 확대 등의 정책을 펴고 있다. 중국은 2035년까지 석탄 의존도를 53%로 줄이고 천연가스 의존도를 11%로 높일 계획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러시아산 PNG가 LNG에 비해 저렴해 중국 기업들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지만 아시아 천연가스 시장이 안정되고 우리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중국의 대기환경이 개선되는 등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말했다.

10년여간 가격에 발목이 잡혀 있던 중·러 가스 협상이 이번에 전격 타결된 건 양국의 입장이 맞아떨어져서다. 양측은 천연가스 가격을 1000㎥ 당 350달러 수준에서 계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가스프롬이 유럽에 공급하는 가스 평균가 380.5달러보다 훨씬 싼값이다. 이재영 실장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유럽의 제재가 본격화하자 러시아에는 서부 루트 개척이 절실해졌고, 시진핑은 이런 러시아의 상황을 활용해 푸틴으로부터 통 큰 양보를 받아냈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큰 손해를 본 건 아니라는 해석도 나온다. 전 세계 천연가스 가격이 하락세이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LNG 현물 가격은 BTU당 13.50달러로 하락했다. 2012년 10월 이후 최저 수준이다. 가격을 낮춰줬지만 장기계약을 함으로써 러시아도 큰 손해는 안 본 것이라는 얘기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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