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추첨 배정의 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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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전국 5대도시에서 시행중인, 고교 연합고사 추첨 배정 제를 다른 지역에까지 확대 실시하려는 문교당국의 방침은 이 제도 추진 과정에서 부각된 많은 문제점을 해소할 아무런 대책이 없으면서 무작정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고교 추첨 배점 제는 말할 것도 없이 자원·교구·시설 면에서의 평준화를 필수 선행조건으로 하고, 그에 따라 학생수준의 평준화를 달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교육 전체의 평준화를 이룩하고자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은 고교의 평준화 시책의 목적과 이상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시책시행 과정에서 야기된 수많은 모순과 부작용은 이미 너무도 뚜렷한 증거에 의해 논증된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학생들의 전반적인 학력저하·학교수업 불신에 따른 과외수업의 과열현상·사학 재정난의 심화 등은 가장 뚜렷하게 부각된 문제점이다.
고교입시가 추첨 배정제로 바뀐 뒤 중학교 교육의 내실은 전반적으로 부실해졌고 학생들은 요행과 사행심만 바라는 나머지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높아가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학력 차가 심한데서 오는 상위권 학생의 학습의욕 상실·하위권 학생의 자포자기 현상은 학생에게나 스승에게나 다같이 고통을 주고 있다.
능력에 극심한 차이가 있는 이질 집단의 학생들을 한 학급에 수용하고서 별다른 교수방법의 고안도 없이 어찌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학급을 지도해야 할 교원의 지도능력을 어찌 나무랄 수만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이 제도는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교육의 질적 향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교육의 평가절하만 초래하고 있음을 외면해서 안 된다.
중학교에서의 과외수업도 종전에는 세칭 일류 고를 노리는 소수 과열이 문제됐으나 이 제도 아래서는 인문 고 합격권에 들기 위한 다수과열로, 그리고 더 나아가 수년후의 대학진학을 미리 대비하는 성급한 조기 과외수업으로 변모하고 있지 않는가.
특히 이 제도 실시를 위한 선행조건으로서 시실·교구·교원의 평준화는 대구·광주·인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부산에서도 혹 달성이 요원한 실정이다.
더욱이 이 제도 아래에서 공·사립간의 수업료를 균등히 책정함에 따라 전국 고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학의 재정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심화돼 가고 있다.
공립고교에 대해서는 별도의 공공재정에서 인건비와 교비 수요의 태반을 지원해 주고 있으나 사립고교는 이같은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공·사립교 간의 평준화는커녕 형평조차 크게 상실되고 있다.
다 같은 납세자인 국민의 자녀를 일방적으로 배정 입학시켜 놓고 국고 보조는 국·공립에만 치우치고 있다.
이대로 나간다면 교육의 질적 평준화는 고사하고 사립고교의 운영 난 때문에 머지않아 전체 교육이 절름발이가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오늘날 고교 입시가 평준화 적응지역과 비 적용 지역으로 이원화됨에 따라 국민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정 상태에서 방황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어중간한 상황은 하루빨리 타결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평준화 시책을 확대 추진 할 수 있는 재정 수단이나 이 제도가 빚는 부작용에 대한 근본 대책 없이 막연히 확대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아무런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시책 추진은 단순히 한번 출발한 시책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식의 관료적 경직성을 나타낸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견지에서 고교 추첨 진학 제 자체에 대한 좀더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이 제도의 성급한 확대보다 교원·시설의 평준화 등 제도 실시의 전제 조건을 이룩하는데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임을 강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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