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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종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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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러셀」의 글에서 읽은 것 같다. 동물의 욕망에 관해서 쓴 글이었다. 짐승에는 식욕·성욕·물욕 등 갖가지 욕망과 본능이 있다. 그러나 한가지 신기한 것은 어떤 욕망의 경우도 스스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돼지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배가 터지도록 먹는 일은 없다. 개는 아무리 예쁜 상대가 있어도 때를 가리지 않고 연정을 느끼는 무절제한 생활은 하지 않는다. 제비는 어느 경우나 흙으로 집을 짓는다. 대리석으로 집을 짓는 제비와 지푸라기로 집을 짓는 제비는 따로 없다. 스스로 절제할 줄 알기 때문이다.
「러셀」이 구태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필경 사람의 경우와 견주어 보려는 심사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닿는데 없어 결국은 파국의 경지에 이르고 마는 것에 경종을 울려 주려한 것이다.
작은 권력을 가진 자는 더 큰 권력을, 작은 사치를 누리는 자는 더 큰 사치를-. 이것은 거의 무한궤도를 달리는 욕망의 속성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명저를 남긴 「에리히·프름」(미 철학자)은 그런 인간의 탐욕을 『바닥 없는 항아리』라고 풍자한 일도 있다.
익살을 즐기는 영국의 작가 「버너드·B·쇼」는 그래서 인간의 비극을 두 가지로 묘사했다. 그 하나는 자기 마음의 욕망대로 하지 못하는 비극, 또 다른 하나는 욕망대로 하는 비극.
그런 욕망 가운데서도 가장 비극적인 것은 허영일 것이다. 「모파상」의 『목걸이』라는 단편이 생각난다. 무도회를 가기 위해 남에게서 빌은 진주 목걸이, 그것도 가짜를 잃어버리고 평생을 두고 그 빚을 갚는 어느 여인의 얘기. 허영은 이처럼 어이없는 비극을 인간에게 안겨준다.
「B·프램쿨린」은 이런 교훈을 남긴 적이 있었다. 「탐욕」과 「행복」은 서로 만나는 일이 없는데, 어떻게 친숙해 질 수 있겠는가 라고-.
그러나 사람에게 마지막 구원의 열쇠가 있기는 있다. 모든 사람이 욕망의 노예로 파멸만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스로 절제하고 억제할 수 있는 이성을 조물주는 사람의 마음에 불어 넣어주었다. 도덕적 절제의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 때문에 인류는 이글거리는 욕망들을 역사의 발전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었다. 인간정신의 권화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인류가 발전하며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은 도덕적인 능력, 그것 때문일 것이다.
요즘 어느 검사부인의 터무니없는 허영과 탐욕의 종말을 보면서 새삼 「러셀」의 말을 다시금 음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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