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의 본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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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망명」을 한자로는 「망명」이라고도 한다. 이름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다.
예의와 명예를 존중하는 동양인의 사고로는 망명이란 오히려 부도덕하고, 불명예스러운 일 같다.
서양인은 망명을 「어사일럼」(Asylum)이라고 한다.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 「붙잡힐 권리가 없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붙잡힐 권리가 없다」는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망명을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는 것 같다. 「정의」를 외치며 어떤 체제에 항거하던 자가 뜻을 이루지 못해 그 체제를 탈출할 경우, 그를 비호해야 한다는, 이른바 초월적인 의의를 갖는 자연법의 발상인 것이다.
16세기 「프랑스」에서 반대파에 의해 박해를 받던 신교도 「유그노」들의 국외탈출, 영국의 절대주의시대인 「스튜어트」조말기 그 체제를 벗어나 「아메리카」대륙에 이주한 청교도, 「아메리카」독립전쟁 무렵 「캐나다」로 도망간 왕당파들, 「프랑스」혁명 당시 국외로 대량 탈출한 「에미그레」들.
이들은 바로 그 망명사의 화려한 「폐이지」들이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러시아」혁명후의 백계 「러시아」인·독일의 「나치」집권 후 유대인과 「리버럴리스트」·「소셜리스트」·「코뮤니스트」들의 국외탈출들이 역사상 유명한 망명을 기록한다.
20세기의 망명자들 가운데는 상당수의 문학자들도 포함되어 한 때 「망명문학」이 한 경지를 이루었던 시대도 있었다. 「프랑스」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탈출했던 「샤토브리앵」의 문학생활이 그랬고, 독일의 문학청년들도 눈부신 활약을 했었다. 전쟁문학의 극치를 보여준 「레마르크」도 「나치」정권에 항거한 망명작가였다. 시인 「하이네」도 독일의 망명문학가였다.
망명이 한창 유행하던 시대엔 「파리」·「런던」·「빈」 등이 그 중심지였다. 그러나 「정치범인 불 인도의 원천」이 「프랑스」혁명이후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고 따라서 오늘날의 망명 지는 특정국에 한정되지 않고 있다.
최근 해외이주가 일반화하면서 우리나라사람들이 빈번히 「망명」을 선언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의아할 뿐이다. 이른바 망명자의 면면들은 대부분이 오늘의 체제에 만족하고 그를 옹호하기 위해 상당한 국록과 고위관직까지 누리던 자들이다. 바로 이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좌절·국내에서의 불명예스러운 비행 내지는 탐욕과 기회주의에 눈이 어두워 「망명」을 선언하는 것은 가소롭기 그지없다. 명분도, 공감도, 더구나 누구의 동정도 받지 못하는 망명이란 미명의 해외도주는 오히려 경멸을 자초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을 높은 지위의 공복으로 보아오던 국민의 우둔함에도 새삼 깊은 자책을 느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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