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해경·괴담에 … 가족들은 지쳐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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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세월호 사고 유족, 실종자 가족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졌고, 분노할 땐 덩달아 화가 났습니다. 물론 안타까움과 슬픔의 깊이는 가족들에 비할 바 아니겠습니다만, 감정의 선은 같이 흘렀습니다. 12년 기자로 일하며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지난달 24일 밤의 일입니다.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과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등이 가족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구조·수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가족들이 항의했습니다. 김 청장은 “어려움 속에서도 수색을 계속 진행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청장의 무전기에서 “물살 때문에 작업을 중단했다”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순간 울컥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누구라도 그러했을 겁니다. 처음 사고 해역에 다다른 해경이 배 안에 들어가 승객들을 탈출시키지 않고 밖에서만 맴돌았다는 소식을 뒤늦게 가족들과 함께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슬픔에도 전염됐습니다. “선실 안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에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예”라고 답하곤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다는 얘기엔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아픔이 절절히 느껴졌던 건 30년 친구의 동생이 희생됐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4반 담임이었던 고(故) 이해봉(33) 교사였습니다. 중학생 때도 휴일이나 방학이면 목공이었던 아버지를 돕겠다고 건설 현장에 나갔던 아이였습니다. 사고 둘째 날 팽목항에서 우연히 마주친 해봉이 어머니는 제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우리 해봉이 좀, 해봉이 좀 구해주라. 너는 뭔가 할 수 있지 않느냐.” 조그맣게 “예”라고 답했습니다만, 그뿐이었습니다. 해봉이는 지난 5일 어머니 품에 안겼습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퍼지는 헛소문들이 가족들을 흔들 때는 한숨이 나왔습니다. “배 안에 아직도 생존자가 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소문은 가족들을 희망에 부풀어 오르게 했다가 주저앉도록 만들었습니다. 죄송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왜 악플과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일이 없도록 진작 노력하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면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숨어있던 치부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해운업계의 비리, 해운사의 탐욕, 세계 1위 조선 강국이란 명칭이 부끄러웠던 해상안전과 구조체계…. 그래서 더 죄송스러웠습니다. 이런 걸 몰랐던 나는 뭔가. 왜 진작 파헤치지 못했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구나.

 잠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던 건 자원봉사자들 덕분이었습니다. 가족들이 괴로워할 때면 봉사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인 양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때론 가족들에게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그러곤 묵묵히 일했습니다. 바라보는 기자도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며 한 달을 지낸 뒤 15일 새벽 팽목항을 떠나게 됐습니다. 노란 리본에 “부디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길…”이라고 적어 팽목항에 늘어선 한 천막에 달았습니다. 발길을 돌리고 되뇌었습니다. “너희들이 태어날 좋은 세상을 열심히 만들어볼게.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권철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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