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해진 러시아의 5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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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5월 초 연휴도 끝이 났다. 나의 조국 러시아에서 5월은 원래 연휴의 달이다. 5월 연휴는 노동절인 5월 1일, 일명 ‘메이 데이(May Day)’로 시작해 9일까지 이어진다. ‘승리의 날’이라고 일컬어지는 9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소비에트연방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로 러시아엔 중요한 기념일이다. 러시아인들은 5월을 뜻깊은 연휴와 함께 시작하는 셈이다. 한국의 설·추석과 같은 정도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연휴를 기념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예전의 러시아라면 노동절 거리는 시위로 왁자지껄했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길가에 나가 노동절 집회를 벌이는 게 옛날엔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노동절은 단순한 휴일이다. 오히려 외국에서 예전 방식의 집회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영국 요크시에서 본 시위도 생각난다. 소련이 무너진 다음엔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노동절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요크시는 물론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영국 노동당원들이 모여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수㎞를 걸어갔다. 시위대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다른 영국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위대를 바라보다 자기 갈 길을 갔다.

오늘날 러시아에서도 노동절 집회가 열리긴 한다. 하지만 집회 참가자들은 대부분 연령대가 높다. 노동절의 참뜻을 기린다기보다 습관적으로 하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은 노동절의 의미를 새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러시아 정부에 불만을 가진 단체들이 노동절을 이용해 집회를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올해도 모스크바에서만 100여 개의 다양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들의 공통점은 하나, 노동절의 원래 의미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결국 ‘노동자의 나라’라는 역사를 지닌 러시아가 그 과거를 지워버린 모양새가 됐다.

러시아의 5월 연휴는 정치적 의미만 지닌 게 아니다. 농경과도 연관이 깊다. 한때 러시아에선 거의 모든 국민이 밭을 가꾸며 겨울철에 먹을 야채며 과일을 재배하곤 했다. 5월 초, 긴 겨울을 지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밭에서 농사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연휴가 생긴 것도 있다. 하지만 이젠 밭에서 일하며 연휴를 보내는 일이 많지 않다.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채소·과일을 밭이 아닌 근처 가게에서 구한다. 힘들게 밭일을 하지 않더라도 쉽게 많은 농작물을 구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방송 등의 영향으로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중시하게 되면서 이젠 밭에서 일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러시아인들이 5월 연휴를 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노동절 집회도, 밭일도 아닌 해외여행이다. 한때 노동의 의미를 새기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위해 농사일을 하며 보냈던 연휴의 의미가 완전히 변했다.

연휴의 의미만 변한 게 아니다. 러시아라는 국가는 지금 환골탈태 중이다. 최근 국제무대에서 일어나는 충돌 때문에 러시아를 소련에 비유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러시아인으로서 그에 동의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러시아는 서방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는 경제발전에서 국제 갈등 해결 노력 등에 이르기까지 서방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서방이 러시아를 과거의 소련과 비교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과거 러시아와 연관됐던 현상들을 오히려 러시아가 아닌 곳에서 많이 본다. 노동절 집회도 그중 하나다. 러시아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러시아인들이 연휴를 보내는 방법의 변천사인 것 같다. 과거의 러시아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이리나 코르군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국제경제대학원을 2009년 졸업했다. 2011년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의 HK연구교수로 부임했다.

이리나 코르군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