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은 3년, 그들은 30~40년 … 공공기관 개혁은 ‘남의 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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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호 03면

관료 공화국. 세월호 침몰 사고로 ‘관피아(관료+마피아)’의 폐해가 드러나면서 자조적으로 나온 표현이다. 국민의 안전을 담당하는 요직을 관료 출신이 장악하고 제대로 감시도 받지 않은 채 끼리끼리 봐주기로 이권을 챙겨온 민낯이 속속 드러난 탓이 크다.

공공기관 ‘풀뿌리 관피아’와 ‘토착세력’ 폐해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공공기관에서도 정부 부처 관료 출신과, 노조를 낀 기관 토착세력이 강철 같은 기득권 구조를 지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기관장은 3년이지만 우리는 30, 40년 자리를 지킨다’는 의식에 젖은 이들의 힘을 무시하고 낙하산으로 내려온 기관장만 바꿔서는 관피아 구조의 척결이 불가능한 이유다.

본지는 공공기관 내에 뿌리 깊은 기득권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현직 공공기관장들을 접촉했고, 이 중 6명이 “안 그래도 답답한 게 많았다”며 실태를 전해 줬다. 이들의 증언은 취재원 보호를 위해 익명으로 처리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취임한 공공기관장 A씨. 여권 출신으로 취임 당시엔 ‘낙하산’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개혁 마인드와 오랜 경험으로 최근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도 공공기관에 와 보고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뭐가 문제인가.
“공공기관 내 기강 해이가 심각하다. 5년 내내 대기 발령 상태로 일을 안 하고도 수억원의 봉급을 받아간 직원이 있다. 지난 대선 때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에 동참한 직원도 있었다. 공공기관에 다니는 사람이 정치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거다. 대학 조교 출신인 한 직원은 지도교수의 해외여행에 따라가 며칠씩 결근하고, 출장비 명목으로 돈을 달라고까지 하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관행이 만연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직원들이 방만해도 해고할 수가 없다는 거다.”

-왜 자를 수 없나.
“해고를 논의하는 인사위원회에 노조가 참석해 그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기관장이 노조를 설득할 수 없나.
“직원들이 기관장 무서운 줄 모른다. 기관장은 임기 3년을 마치면 떠나는데 본인들은 아무리 근무를 태만히 해도 정년인 만 60세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어서다.”

부처 출신 인사들끼리 배타적 모임도
공공기관 직원들 중에서도 정부 부처 출신들은 인적 칸막이를 유달리 강하게 친다고 한다.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장 B씨는 취임 뒤 기관 내에서 부처 출신 인사들끼리만 만나는 모임을 발견하고 모임을 금지시켰다. “부처 출신 엘리트라면 거기서 얻었던 지식과 경험을 부처 출신이 아닌 직원들과 공유해야 하는데 자기들끼리만 나누더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부처와의 커넥션으로 인사를 하면서 ‘아무개는 누구 라인’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또 기관에 와 보니 경제부처 관료들이 공공기관 전반을 장악하고 있더라. 관피아 중에서도 ‘모피아’가 가장 무섭다는 말이 다 이유가 있다. 역대 정부가 경제에 중점을 두다 보니 기획재정부의 위세가 워낙 세 다른 분야 공공기관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거다. 창의적이고 선제적인 업무 자세 대신 뻔한 일만 하는 경제 관료들의 매너리즘이 공공기관에 퍼져 있다. 위기 대응 능력도 떨어진다.”

중요한 순간에 책임지지 않는 문화도 곳곳에 퍼져 있다.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장 D씨는 “화가 난다”고까지 했다.

-어떻게 책임지지 않는다는 건가.
“직원들에게 뭘 해보라고 하면 일단 보고서부터 쓰기 시작한다. 추진 계획서도 아니고 ‘계획을 위한 초기 보고서’부터 쓴다. 황당한 건 그렇게 공문을 중시하는 공공기관들이 정작 중요한 문제는 공문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거다. 평소 공문을 강조하던 상급 부처에 뭔가를 제안하기 위해 공문을 보냈더니 그에 대한 답변은 공문으로 안 보내주고 말로만 하더라. 결국 나중에 그런 일을 추진하지 않은 책임이 불거지면 책임을 피하려는 거다.”

웬만한 일은 무조건 아웃소싱 … 돈 낭비
-다른 문제도 있나.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부서 간에 협업을 해야 하는데 ‘직무기술서’에 쓰인 일 외에는 하지 않는다. 뭔가 하자고 했더니 자기 힘으로 하는 대신 다 아웃소싱(대행)을 주자고 하더라. 국민 혈세를 그렇게 낭비하는 게 일상화돼 있다. 예산을 절약한 아이디어를 낸 직원은 인센티브를 주고, 안 그러는 직원은 규제해야 하는데 그것도 불가능하다. 연공서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그냥 승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이 훨씬 열정적으로 일하는데 그걸 평가할 수 있는 기준도 없다. 관에서 만드는 평가 기준도 작위적이다. 상급 기관 지시를 안 따르면 평가를 낮게 받는다.”

-기관장이 개혁하면 되지 않나.
“관료주의의 특징이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고 하면 싫어한다는 거다. 부처 관리들이 내게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 개혁을 하려면 이해관계자가 있기 때문에 시끄럽지 않을 수 없는데 개혁을 하지 말라는 거다. 관에 오래 있던 직원이 나에게 ‘절대 안 바뀌니 너무 많은 소명감으로 일 하려고 하지 마라. 그러면 상처받는다’고 하더라.”

-정부가 추진 중인 공공기관 개혁으로 달라지진 않을까.
“최근에는 대통령이 ‘기관별로 중복되는 업무를 줄여야 한다’고 하니 ‘지금까지 해온 사업을 무조건 정리하고 관련 상급 부처 2곳으로 업무를 돌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렇게 되면 우리야 일이 줄어드니 편하다. 하지만 정책 수혜자인 국민은 서비스 하나를 받기 위해 2개 부처에 연락해야 한다. ‘정책 수혜자가 너무 불편해지니 다른 방식으로 하면 안 되느냐’고 했더니 바로 ‘대통령 말씀이니 무조건 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런 게 대표적인 관료주의다. 책임은 안 지고 위 눈치만 본다.”

“기관장 개혁마인드·청와대 의지 중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기관장의 개혁 마인드와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허준영 전 한국철도공사 사장은 “개혁을 하려면 저항이 많은 만큼 짧은 임기 동안 뭔가를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확실해야 한다”며 “기관장 개인도 약점이 없어야 한다. 그런 게 있으면 어떻게든 노조가 치고 들어와 공격해 개혁을 못하게 만든다”고 했다.

노조의 무소불위식 행태에 대한 규제론도 제기된다. 기획재정부 경영혁신과 박문배 사무관은 “공공기관 노조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줄 때 노조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노사규정처럼 인사나 경영권에 대한 노조의 간섭은 비정상적 관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이 같은 단체협약을 정상화하라는 지침을 각 공공기관에 내렸다. 안 지키는 기관은 ‘중점관리기관’으로 지정돼 임금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낙하산 관행부터 없애야 한다는 지적은 이미 나온 지 오래다. 한국·민주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 공동대책위원회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에서 확인해 6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지정한 방만경영 중점관리 대상 기관 38곳의 기관장 중 18명(47.4%)이 관료 출신이다. 임원 중에서도 상임감사는 36명 중 19명(52.8%)이, 비상임이사(당연직 주무 부처 현직 관료는 통계에서 제외)는 238명 중 74명(31.1%)이 ‘관피아’였다.

고시 제도의 수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환경부 산하 기관장 P씨는 “결국 공공기관을 규제하는 기관에 관피아가 가서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는 게 핵심”이라며 “고시 제도 자체가 요즘 같은 시대에 맞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청와대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이들도 많았다. 최고 인사권자의 결단이 선결요건이라는 시각이다. 여성가족부 산하 기관장 E씨는 “관료주의가 거대한 구조물처럼 엮여 있어 역대 어느 정권도 손을 못 대고 타협해 왔다”며 “세월호 참사로 문제가 불거진 이번이 그걸 손댈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만큼 정권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기관장 D씨도 “대통령과 공공기관장 워크숍이 지난달 17일 청와대에서 열릴 예정이었는데 세월호 참사가 터지면서 연기됐다”며 “앞으로 워크숍이 열리면 사전 각본 없이 기관장들이 느끼고 경험한 내용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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