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신설될 재난총괄기구 '관료 개조' 1호 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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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 관료 시스템의 한계를 똑똑히 보게 됐다. 평상시에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위기가 닥쳤을 때 우왕좌왕하는 게 우리 공직사회의 현주소다. 늘 하던 일을 할 때는 규칙·기준을 앞세워 느긋하게 처리해도 표가 나지 않는다. 담당 구역·업무만 챙겨도 중간은 간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가 터지거나 재난이 닥쳤을 때 상황은 달라진다. 직면한 문제를 유연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함에도 관료사회의 경직성과 밥그릇 챙기기 문화가 번번이 가로막는다. ‘관피아’(관료 마피아)는 고질적인 폐쇄행정의 상징이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국가개조, 관료사회 개조의 명분은 충분히 쌓였다. 하지만 공직사회 전체를 한꺼번에 뜯어고칠 방도는 사실상 없다. 이번 정부에 이어 다음 정부가 끈질기게 매달려야 성과를 거둘 만한 거대한 개혁과제다. 이 시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1차 혁신 과제를 명확히 정해야 한다. 우선은 안전행정 혁신에 총력을 다하기를 바란다. 특히 신설될 재난총괄기구를 관료사회 개조의 시범 케이스이자 안전행정 혁신의 1호 사례로 만들 각오를 해야 한다.

 조직 설계 단계부터 달라야 한다. 민간·국회가 주도해 새로운 상상력과 영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야당·시민사회와 학계·산업체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나 홀로 개혁’은 반드시 실패한다. 수술 대상인 안전행정부·해경은 뒤로 물러나야 한다. 조사를 받아야 할 집단이 ‘셀프 개혁’을 하겠다고 나서면 코미디가 된다. 행정조직은 민간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 일본 나카소네 총리는 1980년대 행정개혁을 하면서 민간 명망가에게 칼자루를 쥐여주었다. 행정개혁심의회장에 도시바 CEO를 지낸 도고 도시오를 앉혀 완고한 관료조직을 어느 정도 수술할 수 있었다.

 재난총괄기구 논의의 한계도 당분간은 두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과 총리 중 어디에 둘지를 놓고 논란이 많다. 어느 경우든 큰 위기가 왔을 때 국정 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면 된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국토안보부를 신설한 뒤 막강한 힘을 실어주었다. 안행부와 해양경찰청의 수술은 불가피하다. 재난총괄기구가 만들어지는데 안행부의 방만한 조직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일부에서 해양경찰청을 해양방재청으로 바꾼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그저 자리를 보전하는 방식이라면 민심의 역풍을 맞을 것이다. 해체한 뒤 재조립하는 수준의 비장함이 필요하다.

 공직의 청렴성·창의성·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민간전문가를 채용하는 ‘개방형 임용제’가 1996년 도입됐지만 유명무실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고위공무원(1~3급) 직급의 8%만 외부 인사로 채워졌다. 재난총괄기구는 능력 있는 재난전문가가 진입할 수 있는 임용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계급 서열대로 줄을 서 자리를 차지하는 승진 방식으론 안 된다. 국민 입장에서 몸을 던져가면서 창의적으로 일하는 공무원이 쭉쭉 뻗어 나가도록 인사구조도 확 뜯어고쳐야 한다.

 탄생하게 될 재난총괄기구는 공직 사회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는 시범 케이스가 돼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제2, 제3의 혁신 사례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면 그것이 관료 개조요, 국가 개조다. 세월호 희생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이번만은 안전행정의 교두보를 튼튼하게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