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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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새 불씨는 2년 전에 인도의 영자신문이 문제의 「카필라」성의 옛 도시가 인도령의 「피푸라하와」에서 발굴되었다고 보도한데서 시작되었다. 동지는 『지난 6년간의 동지발굴의 결과는 「카필라바스트」를 결정적으로 보증했을 뿐만 아니라 1백년에 걸친 대 논쟁에 결론을 내린 것이다』고 장담했다.
여기에 「네팔」불교협회가 즉각 반론을 낸 것은 물론이다. 「네팔」쪽에서는 자기네의 「치라우라코트」가 「카필라」성의 옛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치라우라코트」는 석가가 태어난「룸비니」원으로부터 13㎞떨어져 있다. 한편 인도 쪽에서 주장하는 「피푸라하와」는 13㎞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더욱이 「피푸라하와」는 또 다른 불적의 하나인 「간와리야」에서 2㎞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니까 인도 쪽 주장이 더 그럴듯하기도 하다. 더욱이 「피푸라하와」발굴단장은 이곳에서 석가의 부왕의 왕거군임을 입증하는 유물들을 많이 찾아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네팔」쪽 반론도 그럴 듯 한 것이다. 우선 「카필라」성 옆에는 「파기라티」강이 있었다는데 「피푸라하와」에는 강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카필라」성을 다녀온 현장이나 법현의 순례기에서 묘사한 「카필라」의 옛터와 「피푸라하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네팔」쪽 고고학자들의 반론에는 이밖에도 6가지의 근거가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아직도 「네팔」영의 「치라우라코트」가 「카필라」성의 옛터였을 가능성이 더 많은 것이다.
석가의 생지를 둘러싼 인도와 「네팔」쪽의 싸움도 오랫동안 치열했었다. 그게 「네팔」국내에 있는 「룸비니」라고 확정된 것도 그리 오래된 얘기는 아니다.
석가에 얽힌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어야할게 많다. 생일부터가 분명치가 않은 것이다.
중성점기라는 중국의 고서에 의하면 석가의 생년은 기원전566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후의 새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483년으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늘을 불기2521년으로 삼고 있으니까 기원전544년을 생년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사실은 석가가 정확하게 언제 태어났느냐는 것은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 「카필라」성이 「네팔」영에 있었느냐 아니냐는 것은 더욱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양국으로서는 보통 일이 아니다. 그들의 심정은 이해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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