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젊어진 수요일│청춘리포트 … 연애의 조건] "어디 살아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온통 없는 것밖에 없는 시절. 청춘이란 그런 것입니다. 가진 거 좀 없으면 어떤가요. 얼마든지 실패해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게 바로 젊음이죠. 그런데 요즘 2030 세대는 이런 젊음의 특권을 모른 체하는 것 같습니다. 연애 단계부터 상대가 부유한 동네에 사는지, 부모님 재력은 빵빵한지부터 따지는 이가 많습니다. 청춘리포트는 불편한 진실 한 토막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젊음의 가능성 대신 지금 주거지가 어딘지를 기준으로 연애 상대를 고르는 요즘 청춘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어디…살아요?”

 허리선이 붙는 새하얀 원피스, 뽀얀 얼굴에 큰 눈을 껌뻑이던 여자는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이렇게 물었다. ‘김치찌개 좋아하세요?’처럼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다. 남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서울 외곽에서 자취해요. 혼자 산 지 오래됐어요.”

 순간 여자의 뽀얀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그 여자는 소개팅 시작 30분 만에 다른 약속이 있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남자는 딱히 붙잡을 핑계도 없어 여자를 그냥 보냈다. ‘원룸이라도 구해서 강남 쪽으로 이사를 와야 하나?’ 남자는 다음 소개팅 날짜를 확인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이야기는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 사는 스물일곱 살 남성 직장인의 실제 사례다. 이것은 특별한 사례가 아니었다. 청춘리포트가 만나본 대다수의 20~30대 미혼 남녀들은 연애의 조건으로 주거 지역을 최우선순위로 꼽았다.

 2030세대에게 주거 지역은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라 연애 상대를 결정짓는 중요한 경제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요즘 청춘 세대의 소개팅·맞선 자리에선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이 학력·직업을 물어보는 것보다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거주 지역이 상대방의 재력을 판단하는 일차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님과의 동거 여부가 중요하다. 똑같은 강남 지역에 살더라도 원룸에 사느냐 부모님 소유 아파트에 사느냐를 따져 묻는 것이다. 아직 20~30대에 불과한 상대의 재력보다는 시댁이나 처가의 재력이 더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결혼정보업체 듀오의 연애코치 이명길 과장은 “지금의 2030세대는 어릴 때 외환위기 충격을 경험한 세대라 굉장히 현실적”이라면서 “생존에 대한 부담감이 강하고 출산과 육아까지 고려하기 때문에 상대의 재력이나 주거 지역을 꼼꼼하게 따진다”고 말했다. 듀오의 한 커플매니저는 “상대가 성남에 산다고 하면 꼭 ‘분당요?’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분당 중에서도 어느 구는 집값이 저렴하지 않으냐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해 당황할 때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시댁이나 처가에 육아를 맡기는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크게는 ‘서울 사람’을, 작게는 ‘회사 근처에 사는 사람’을 찾는 것도 원인이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30세대가 연애 상대의 거주지로 가장 선호하는 곳은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다. 실제로 청춘리포트가 미혼 남녀 200명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3개 복수응답) 연애 상대의 거주지 선호도는 ▶서초구(20%·117명) ▶강남구(18%·105명) ▶송파구(10%·60명) 순으로 나타났다. 마포구·용산구가 뒤를 이었다. 이들의 지역 선호도는 서울의 평당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과 거의 일치한다. ▶강남구(1046만원/㎡) ▶서초구(916만원/㎡) ▶송파구(720만원/㎡) ▶용산구(808만원/㎡) 순이다. 부동산 가격이 소개팅 상대 선호도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강남으로 대표되는 부촌을 선호하는 이유는 ‘후광효과’ 때문”이라며 “상대적으로 식당이나 데이트코스에 밝고, 문화적 수준이 높을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더해져 선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디 사세요’라는 물음엔 남녀 차이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여성은 상대의 경제력을 판단하기 위해 거주지를 물어보는 반면, 남성은 자신의 집·직장과의 물리적 거리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질문을 한다는 얘기다. 듀오의 권현정 매니저는 “남성들이 예전만큼 희생하거나 손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집이 멀면 일단 거절하고 본다”며 “쉽게 말해 일산 여자와 분당 남자가 소개팅으로 만날 확률은 극히 적다”고 말했다.

채윤경·이지상 기자

2030 싱글 남녀의 고백

세종시 거주 경제부처 사무관 A (33·남)
고시 패스한 뒤 인기 좋았는데
세종시 발령나니 연락 다 끊겨

지난해 부처가 이동하면서 세종시에 내려왔어요. 갑자기 여성들의 반응이 확 달라지더군요. 행정고시를 막 패스했을 때만 해도 예쁜 여자들이 줄줄이 소개팅을 하자고 연락이 왔었는데…. 정작 세종시 발령이 난 이후에는 가깝게 지내던 모든 여자가 연락을 끊더라고요.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저도 적응하기 쉽지 않은데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여자들이 지방에 사는 남자를 좋아할 리가 없죠. 이제는 정말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싶어요. 그래서 주말마다 소개팅 하러 서울로 올라가요. 물론 승률은 좋지 않습니다. ‘행정고시 패스’ 타이틀도 다 소용없더군요. 결혼해서 세종시에 살아야 한다고 하면 여자들의 표정이 딱 굳어버리거든요.

마포구 오피스텔 거주 회사원 B (34·남)
서울 밖에 사는 애인과 데이트
바래다 주려면 기름값 장난 아냐

소개팅을 할 때 ‘어디 사느냐’를 중요하게 봅니다. 주 중에 한두 번이라도 데이트를 하려면 회사나 집이 서로 가까울수록 좋거든요. 분당이나 수원, 인천에 사는 여성들도 만나봤지만 결국 시간 약속 잡다가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연애 초반에는 집에도 데려다줘야 하는데 수원이나 인천에 한 번 갔다오면 기름값 장난 아닙니다. 데이트 시간보다 바래다주는 시간이 더 길 때도 있고. 그 뒤로는 아예 저와 같이 광화문에 직장이 있거나 제가 사는 마포와 가까운 여의도·공덕에 사는 여성들을 일부러 찾습니다. 비슷한 지역에 산다는 건 소개팅할 때 확실한 강점이 되거든요. 홍대나 합정역 근처에서 1차로 만나고 이태원 가서 술 한잔 하면 소개팅 애프터 성공률이 확실히 높아지죠.

강남구 원룸 거주 회사원 C (29·여)
택시 타서 “도곡동이요” 했더니
기사 아저씨 “우리 아들 만나봐요”

인천 부평에 살다가 1년 전 출퇴근 거리를 줄이려고 도곡동으로 이사 왔어요. 주변 사람들 대우가 180도 달라지더군요. 인천 살 때는 ‘거기서 어떻게 회사를 다니느냐’며 불쌍하게 쳐다보던 사람들이 도곡동에 산다니까 ‘부모님이랑 같이 사느냐’ ‘혹시 타워팰리스냐’ 물어봐요. 한동안 뚝 끊겼던 소개팅도 갑자기 몰려들기 시작했고요. 얼마 전엔 포스코 건물에서 택시를 타고 도곡동으로 가자고 하니까 기사 아저씨가 “좋은 직장 다니고 집도 좋은 데 사네. 우리 아들이 대기업 다니는데 한 번 만나볼 생각 없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소개팅이 밀려들고 ‘강남 키즈’ 출신 남자들과 만남이 늘어난 것도 당혹스러워요. 저는 강남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집도 이전 집 절반 크기인 원룸에 사는데….

노원구 아파트 거주 교사 D (27·여)
강남에 원룸 월세 살면 말짱 꽝
시부모 재력이 더 중요한 시대

강남 사는 남자를 선호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친구들 사이에 청담·반포·대치·서초·압구정·동부이촌동 남자가 소개팅 들어오면 ‘꺅!’, 잠실·용산·분당·판교·목동 남자를 만나면 ‘오호~’, 그 밖의 지역은 ‘응?’ 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요. 대놓고 말은 못해도 동네로 재산 수준은 가늠할 수 있잖아요. 소개팅에서 ‘어디 살아요’ 다음으로 빠지지 않는 질문은 ‘부모님이랑 같이 사나요’예요. 집은 지방이고 강남에 원룸 월세 살면 말짱 꽝이잖아요. 요즘은 남편 직업보다 시부모님 재력이 더 중요한 시대라 무시 못해요. 당장 서울 전셋값이 최소 2억원 이상인데 우리 나이 직장인이 그만한 돈을 모은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잖아요. 서로 사는 곳을 미리 알려주는 건 소개팅의 예의죠.

구로구 원룸 거주 회사원 E (28·남)
제 사진에 반해 나온 소개팅녀
사는 곳 말했더니 “거기가 어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 졸업하고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기업 다닙니다. 외모는 배우 김재원씨를 조금 닮았고요. 키도 1m75㎝로 나쁘지 않은데 소개팅은 번번이 실패합니다. 소개팅에서 재밌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제가 구로동 원룸에 산다고 하면 여자들 표정이 곧바로 일그러지죠. 소개팅녀의 반응을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이런 식입니다. ①(고개를 갸우뚱하며) 거기가 어딘가요? ②(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며) 회사 다니기 힘들지 않으세요? ③(애써 웃으며) 저희 집하고는 거리가 좀 있네요. 열에 여덟은 제 직장과 사진을 보고 소개팅에 나왔다가 사는 곳을 듣고선 돌아섭니다. 좀 순진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사는 곳과 상관없이 저를 좋아해줄 여자가 나타날 거라고 믿어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