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수표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일반가정에서 많이 이용하는 예금의 체계를 개선하는 일은 저축인구의 바탕을 넓힌다는 공리적 잇점외에도 소위 금융의 대중화를 통해 신용거래질서를 보다 진전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의 금융저축제도는 주로 기업중심으로 설계되고 운영되어온 탓으로 일반시민들은 금융기관일반에 대해 상당한 거리감을 갖고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은행의 문턱이 높아보이는 느낌은 한번쯤 은항거래를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런 뜻에서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일반가정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이 최근 계속되어온 것은 옳은 방향이라 하겠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아무리 제도상으로나 금리면에서 약간의 대우가 개선된다해도 가계전반의 은행거래 관습이 아직도 일천하고 은행과 고객의 실질적인 관계가 여전히 대고객 위주에서 탈피하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금방 사태가 호전될지는 의문이다.
더우기 이같은 대가계 접근시책이 행여 저축흡수라는 눈앞의 목표에만 집착하게 되면 금융의 대중화라는 보다 큰 목표는 아무래도 퇴색하게 마련이다. 때문에 단기예금의 금리를 올리고 가계실정에 맞는 갖가지 예금제도를 개발하는일 못지 않게 금융의「서비스」가 질적으로 개선돼야한다. 가장 서민과 친근해야할 주택금융이나 서민금융에서조차 이런 점에 소홀한바가 적지 않은 현실은 제도보다 실질운영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예증한다.
이번에 금리를 약간씩 올린 단기성예금은 원래는 은행의 자금 「코스트」라는 측면에서 보면 경영수지의 압박요인이 된다. 그러나 이런정도의 부담은 충분히 감수해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우리 가계의 일반적인 저축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아서 이런 제도개선이 얼마나 큰 실효를 거둘지는 미지수에 속한다.
새로 만들어낸 가계수표제도도 이런 점에서 문제가 없지 않다. 외국에서는 거의 생활화되고있는 이 제도는 분명 현대신용사회를 상징하는 참신한 제도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그것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여건인가는 더 좀 생각해볼 문제다.
일반가정에서 과연 월급을 통장에 모두 넣어두고 필요할때마다 수표를 끊어 쓸 수 있는 여력이 있을까. 설사 그런 여유가 있는 가정이라도 고액권이 상대적으로 많이 유통되는 우리현실에서 공연히 변잡스럽기만 하지는 않을까.
이제도가 월 급여 25만원이상의 소득자로 한정하고 있듯이 결국 이 제도는 여유있는 사람의 호사취미나 「스레이터스·심벌」로만 이용될 소지는 없는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더욱이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대로 개인수표가 일반상거래에서 신임을 얻는데는 적지 않은 난관을 겪을 것이다.
일반당좌수표조차 부도율이 높은 저신용단계에서 가계수표제의 도입이 약간 성급하지 않으냐는 금융계의 반발은 충분히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 제도가 소비를 조장하는 부작용을 빚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신용질서의 근대화도 필요하지만 현실을 앞선 지나친 세련이나 모방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빚을지도 모른다. 금융의 대중화를 위한 이 제도가 오히려 대중과 멀어질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