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천의 얼굴’ 거물급 신인 탄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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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호 06면

아마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천우희(27)가 맡은 미란 역은 그렇게 비중이 있지도, 눈에 드러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워낙 천우희가 연기를 잘했을 것이다. 그래서 감독(이한)은 그녀가 맡은 캐릭터를 조금씩 늘리게 됐을 것이다.

독립영화 흥행신기록 ‘한공주’의 천우희

주인공 만지(고아성)가 자신의 동생 미소(이영은)를 공격하려 할 때마다 미란은 온몸으로 그녀를 막아선다. 만지는 동생 천지(김향기)의 자살 뒤에 미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지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미소의 언니인 미란은 동생이 절대 그러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아니, 동생이 그랬다 한들 상관없다고 한다. 둘도 없는 동생이니까. 천우희는 엄마 아빠에게 버림받은 동생을(자신도 똑같은 처지이면서) 위해 꿋꿋하고 씩씩하게 버텨 나가려는 언니의 결기를 그렇게 연기해 낸다.

개봉 12일째인 4월 28일 관객 15만1366명을 불러모으며 한국 독립영화 극영화 부문 최단기간 최다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운 ‘한공주’에서는 좀 반대다. 천우희는 이번엔 가능한 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아마도 이 영화를 만든 이수진 감독은 천우희에게 줄곧 그런 디렉션을 내렸을 것이다. 자 자, 영화 속에서 공주는 끔찍한 일을 겪은 애잖아, 그걸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어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어떻겠어? 얼굴에 가능한 한 표정이 드러나면 안 되는 거잖아 등등.

영화 속 공주는 처음에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지내려 한다. 그래서 카메라는 어떤 때는 아예 그녀의 뒤로 돌아간다. 그녀가 모든 사연을 감춘 채 서울로 전학 온 학교 복도에서 카메라는 이어폰을 꽂고 걸어가는 한공주의 뒷모습을 한동안 따라간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모든 것을 다 알게 된 후에는 한공주의 정면을 쳐다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민망하고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차라리 그녀의 뒤만 따라가고 싶어진다. 그 뒷모습만으로 모든 사연, 곧 절망과 잃어버린 자존심과 희망 등등을 표현해 내기란 도통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천우희가 뒷모습만으로 감정을 표현해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금 새로운 여배우를 발견해 내고 있는 와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천우희는 진작부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건 이 여배우가 반짝 스타가 되려는 쪽으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오래 연기할’ 배우가 될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쪽이었다. 천우희 같은 배우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생의 동반자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와 같은 시대에서 부대끼고, 호흡하고, 나누며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영화 속 천우희처럼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그래서 우리 역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갖고 살아도 된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준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역할은 최고인 셈이다.

천우희는 어디로 튈지, 어떤 배우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성장 가능성이 무한에 가까운 배우다. 짐작하건대 굉장히 큰 무대로 나갈 공산이 크다. 지금 그만큼 아시아적 이미지를 강하게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러 표정의 연기를 구사할 수 있는 여배우는 별로 없다. 마리옹 코티아르조차 그녀에게 반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공주’를 보고 나서 한동안 한공주, 아니 천우희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은 짐승처럼 욕정을 참지 못한 고등학생 남자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들 전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화는 각자 스스로에게 그 같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만든다. 천우희의 불꽃 같은 연기 덕이다. 빨리 ‘한공주’의 천우희를 잊고 싶은 건 순전히 그녀 안에 그녀가 수백 개 이상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또 다른 천우희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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