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과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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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복음의 말은 현대인에게는 너무나도 엄청난 우화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부활」이라는 이 사건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신앙의 핵심이며 진정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에 현세에 집착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현대인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다.
잠시 다음과 같은 참회의 귀절을 생각해 본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예수 안으로 들어간 우리 모두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읍니다.…이와 같이 여러분도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났으며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 6장3·6·11절)
우선 우리는 죄에서 죽어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노예가 되어 선행보다는 악행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같은 「로마」 서에서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선을 하려는 의지는 갖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나는 내가 해야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은 행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하기가 어렵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선행을 할 수 있다면 오늘날 이렇게 잔인한 범죄들은 없었을 것이다.
해마다 대학원이나 대학에서 박사·석사·학사들이 수만명씩 쏟아져 나오건만 이 사회는 조금도 도덕적으로 좋아지지 않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교육이 잘못되었다고만 말할 것인가? 그렇지 만은 않다.
교육만 잘못 되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선한 의지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렵고 오히려 악행을 하고 마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엇인가 중대한 것이 내포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인간 이상의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어 행위를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악이 인간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소멸시킬 선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 선의 의지와 실천 사이의 「갭」을 메우는 무엇이 있어야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우리 인간의 종착역은 부활이다. 그러나 그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 없이 이룩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현세에서, 악에 죽고 선에서 부활한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 요구된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고 영원히 살아가는 부활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확신하는 삶은 희망과 환희에 넘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먼저 자신의 육체적 취약성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죄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때 우리는 부활할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인간의 한계를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신 안에서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비의 생명에 자신을 의탁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
▲50세·평남 출생 ▲현 「가톨릭」 서울 명동성당 주임 신부 ▲서울「가톡릭」신대 졸업 ▲「프랑스」「뤼송」대 철학과, 「파리」「가톨릭」대 사회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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