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잃은 독립유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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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유관순의사의 사촌언니이며 기미년 3·1운동때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동지이기도 한 유 례도할머니(82·서울영등포구고척동271의48)가 최근 홀로 살아온 집을 잃고 노구를 의지할곳이 없다.
세를 주어 근근히 샅아오오던 2O여평짜리 집이 자신도 모르는 사연으로 경매에 붙여져 25일 집달리들에 의해 강제차압을 당하는 바람에 많지도 않은 가구와 함께 차가운 길거리로 쫓겨나게 된 것.
2년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아들 한필동씨(56·「로스앤젤레스 거주)가 함께 가자고 권했지만 『얼마 남지않은 여생, 태어난 조국에서 살다 묻히겠다』며 동행을 거부, 기동이 어려우면서도 방 2개를 세놓아 손수 밥을 지어먹던 할머니였다.
기미년 3·1운동당시 유할머니는 22세의 꽃다운 처녀로 이화학당 고등부 5학년이었고 사촌동생 관순양은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지자 자매도 태극기릍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검거되고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은 자매는 고향인 충남천원군간면지룡리(현 천면룡두리)에 내려가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일경의 감시가 심했지만 낮에는 집안일을 돌보는체 감시의 눈을 따돌리고 밤이면 자매는 이마을 저마을을 돌아다니머 서울의 소식을 전하며 거사를 준비한 것.
드디어 그해 음력으로 3월1일. 아내강터(현 벽촌장)는 2천여명의 주민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으로 들끓었다.
인근 천안에 있던 일본수비대가 출동, 주민 5∼6명이 총에 맞아 숨지고 수십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동생 관순양과 아버지 종무씨도 함께 체포되었다.
유할머니는 친척들이 숨겨줘 체포는 면했으나 아버지와 관순양이 서울고법에서 3년6개월을 선고받던날 귈석재판에서 7년7개월의 형을 받았다.
유할머니는 마을주민들의 도움으로 피신생활을 해오다 한태유목사의 권유로 안전한 피신을 위해 한목사의 동생 철유씨(당시31세)와 결혼언약을 맺고 충남홍성군금마면부꾸리 한씨집에서 신혼겸 피신생활을 했다.
한씨와의 사이에 2남3녀를 두었다.
장남 필동씨는 일제말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대륙에서 중국군포로수용소 감시병으로 있던 중국군을 탈영시키고 자신도 함께 탈영, 중국군대위로 근무하다 광복군에 편입돼 광복운동을 벌였으며 둘째아들은 6·25때 전사했다.
3대가 조국광복을 위해 싸운 셈.
그러나 유할머니의 독립운동경력은 숨은 사실로만 전해 내려오고 있을뿐이다.
자신이 받은 7년7개월의 형이 법원판결문이 분실돼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러나 조국이 광복된 것이 기쁠뿐 한번도 이를 원망해보지 않았다는 유할머니는 『관순이가 옥사하고 아버지가 출옥후유증으로 하혈을 하다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도 밖에 나타나지 못하고 숨어살아야 했던 것이 무엇보다드 가슴아팠던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세딸이 있지만 한결같이 생활이 어려워 혼자 살아온 유할머니는 이번 장남 필동씨가 한국에 있을때 재정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돼 문모씨(50·서올영등포구화곡동)에게 집이 넘어가자 갈 곳을 잃은 것. 3·1절이면 꼭 아버지와 동생 관순의사의 제사를 모셔왔다는 유할머니는 『내가 죽을 때 까진 제사를 거르지 않으려 했는데 올해는 어디서 제사를 모셔야 하느냐』며 주름진 얼굴에 눈시울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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