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뒤흔들고도 … 관피아, 책임 안 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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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5일 한국전력이 예고 없이 5시간여 동안 전력공급을 중단하면서 공장과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등 대혼란이 빚어졌다. 이른바 ‘9·15 대정전’이다. 그 직후 정부는 사고 책임을 물어 17명을 징계했다. 전력거래소 염모 이사장과 운영본부장을 면직하고 공석 중이던 한전 사장 권한대행을 맡았던 김모 부사장을 해임했다. 주무부처인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과장은 견책 처분을 받았고 담당 에너지실장(1급)·에너지산업국장은 보직이 변경됐다. 나머지 11명은 실무자들이다.

 그런데 지경부 국장 출신의 염 이사장은 지난해 7월 산업부 산하기관인 한국에너지재단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보직변경 결정을 받았던 에너지 실장은 지경부의 또 다른 핵심 보직인 산업경제실장으로 옮겼다가 지난해 4월 퇴직하면서 산업부 산하기관인 산업기술진흥원장에 임명됐다. 또 에너지산업국장은 잠시 교육파견을 갔다가 지난해 4월 새 정부 들어 산업부가 외교부로부터 넘겨받은 통상분야의 초대 국장으로 복귀했다. 견책 처분을 받았던 담당 과장은 법원에 소송을 내 징계취소 결정을 받았다. 정무직인 최중경 당시 장관의 사임을 제외하곤 사실상 관피아(관료 마피아)는 모두 징계를 피해갔다.

 이처럼 대형 사고가 터져도 관피아들은 별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정책적 실패나 업무 소홀로 나라가 휘청거려도 형사처벌은커녕 징계를 받는 경우조차 드물다. 모든 책임은 관료들의 지시를 받아 현장에서 일하는 민간 실무자들에게 지워진다.

 최근 발생한 저축은행 사태, 신용정보 유출, 원전비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사고 때도 양상은 비슷했다. 관피아들이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부정한 돈이 오간 경우가 아닌 한 정책적 실패에 대해 형사적 책임을 물리기는 쉽지 않다. 가끔 업무상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묻기도 하지만 형량이 낮다. 이 때문에 책임추궁과 처벌의 방식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나승철 서울변호사회 회장은 “가장 처벌이 어려운 범죄가 고의성 입증이 필요한 공무원의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라며 “민사적 책임과 행정적 징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직후 미국은 의회 주도로 책임 소재에 대해 공개 조사했고, 뉴올리언스 시장과 연방재난관리청장을 청문회에 세웠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시민 1만여 명은 도쿄전력과 정부 공무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마저도 법원의 엄격한 잣대를 통과하기가 어렵다. 지난해 부산저축은행 투자 피해자들은 은행 관계자와 함께 금감원·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하지만 금감원 직원들의 금품수수 혐의가 드러났음에도 법원은 금감원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채용과 평가 시스템을 개혁해 관료들이 긴장감을 늦추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남대 행정학과 이해영 교수는 “관료들의 순혈주의로는 우리 사회를 더 이상 업그레이드할 수 없다”며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공존해야 서로 견제가 되고 창조도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최현철 기자, 뉴욕=이상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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