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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연두회견 1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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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통령회견 10년-.
올해로 꼭 열번을 치른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회견은 연두교서를 대신해 완전히 틀이 잡혔고 가장 큰 연중행사의 하나로 정착이 됐다.

<68년부터 기자회견으로 바꿔>
○…신문이 잡은 올해의 회견표제는 『남북한상호불가침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철수 반대하지 않겠다』 『북한이 원한다면 인도적 견지에서 식량을 원조할 용의가 있다』 는 것. 그렇지만 역점이 두어진 핵심발언은 상황에 따라 해마다 달라져온 것이 사실이다.
한해전인 76년엔 『영일만서 석유발견』-. 75년엔 『북괴위협 일소될 때까지 현행 헌법 못 고친다』-. 더 거슬러올라가면▲74년=「남북한 상호부가침협정」체결제의 ▲73년(10윌유신 다음해) = 「초당적 유신내각구성」「 의원선거는 2월말께」 ▲72년 ( 「닉슨」 방중다음해) = 「우리에게 부리한 미·중공 결점 승복 않겠다」 「남침야욕 버리면 북괴와 대화」 ▲7l년= 「주월국군 단계적으로 감축」▲70년=「통일에 적극접근 시도」 「안정위주 중진국달성 ▲69년(3선개헌을한 해)= 「개헌 논의 꼭 필요하다면 연말께 해도 늦지 않을 것 ▲68년=「근대화는 균형성장으로」 「제2경제란 정신적인 자세」 .
박대통령이 해마다 내놓은 중요시정목표도 10년 동안「뉘앙스」가 달라져 왔으나 경제와 국방이 주조를 이뤄온 것이 특징.
68년에는 ①국방력강화 ②치안태세확립 ③경제건설로 집약이 됐고 69년도 시정목표는 ①자주국방태세의 강화 ②경제의 지속적 고도성장 ③경제체질의 개선. 시정목표는 이와 비슷하게 계속이 됐으며 76년은 ①국가안보 제1주의 ②경제의 안정과 착실한 성장 ③국민 총화체제의 강화가 대두. 말하자면 총화체제구축과 총력 안보태세확립이 경제의 성장과 함께 전면에 내세워져 시정의 기틀이 됐다.
○…67년까지만 해도 대통령 연두교서가 국회를 통해 나왔으나 이해 말엔 여야가 대립했다.68년에 접어들어서는 임시국회조차 열지 못한 상태에서 한 공화당간부는 『국회에서의 연두교서발표는 헌법이나 법률에 근거를 두고있는 것이 아니라 의정의 관례이기 때문에 야당이 이틀 방해할 경우엔 다른 형태로 발표 할 수 있다』 고 기자회견을 암시.
그래서 68년1윌15일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막을 올린 연두회견은 박대통령으로서 6대대통령이 된 후 처음이며 5대때를 합치면 4번째 공식회견이 됐던 것.
소요시간은 1시간40분.13개항목에 대해 박대통령은 경제문제가 나♀조 소상히, 정치문제엔 간결히 대답했다.
회견 4일 후인 19일 신범직 청와대 대변인은 『금년부터 대통령연두교서를 취소하기로 했다』 고 공식 발표. 이유는 ①예산교서와의 중복 ②격화된 여야관계와 국회사정이 들어졌다.
그 후 박대통령도 『연두교서에서는 전반적인 사항에 걸쳐 광범위하게 언급하여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없는데 회견은 중점적으로 질문해 답변하기 때문에 좋다』고 회견을 찬성, 연두회견 정례화의 방향이 확정됐다.

<71년 이후 「국력배양」을 강조>
○…68년 첫 연두회견에서 나온 「제2경제」 는 그 개념파악과 실시방향에 대해 관심들아 모아졌다.
박대통령은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사물에 대해 긍정적이고 선의적인 관찰과 비판을 하는 것이 제2경제의 요체』라고 풀이했고 『학술용어는 아니며 내가 제창한 것』 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던 것.
「자주국방」은 69년부터 강조가 됐고 국력배양은 「평화화통 」 의 첩경은 「국력배양」이라고 선언한 71년 연두회견에서 시발. 72년 「북괴와의 대화」를 제의한 박대통령은 그 해 7·4공동성명등을 내놓는 등 남북친화를 실현. 이해는 비상사태가 선포된 해이기도 하거니와, 박대통령은『국가안보의 위험도를 측정하는 책임이 대통령의 가장 큰 책임』 이라며 비상사태선언 배경을 설명했다.
10월 유신 후 가진 73년 연두회견에서는 정당과 국회를 크게 비판.『당리·당략을 앞세워 국론을 분열시키는 사이비 정당은 용납될 수 없다』 『모든 정당이 국력조직화에 나서야한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국력배양을 저해한 요인은 우리국회의 비능률적인 운영 때문이다』 -.
학생「데모」가 한참 있던 다음해, 74년 회견에서는 학원사태에 대해 『학생들이 매판자본이니, 경제 예속이니를 주장하고 있으나 과연 매판자본이 무엇인지 알고, 그러는지, 덩달아 떠드는지 모르겠다』 『「데모」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날마다 「데모」하도록 하겠다』 고 발언.
75년 회견에선 『헌법만 뜯어고치면 만사해결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말이다.』 『옛날헌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솔직히 말해 나라 망하는 길이다』 라고 했고 『민주제도는 그 나라에서 자랄 수 있는 토양과 풍토가 있어야 한다. 제주도 밀감나무를 서울에 가져다 심어도 살지 않는다』고 무비판적인 민주제도 수용론을 배격.

<최장기록은 74년 3시간13분>
○…회견시간은 3시간13분(74년)이 가장 길었고 1시간35분(69년)이 최단기록. 10회 평균시간은 2시간 20분.
질문은 대개 10개항 안팎이었으나 69년이 16개항목, 75년이6개항목으로 많고 적은 기록.
7O년까지 세 차례를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회견했으나 71년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로 장소를 옮겼고 회견 후 다과를 베풀며 참석자와 기자들과 환담하는 관례는 74년부터 생략되고 대신 총리실에서 여당간부 및 몇 국무위원과 점심을 들게된 것도 변화의 특색.
첫 회견참석자들을 보면 정일권 총리와 전 국무위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종필 공화당 의장, 길재호·백남빈·김진만·김재순씨등 당간부들.

<석유 1배럴은 0·8드럼>
○…박대통령은 회견에서 고사·고담·명 구절 등을 많이 인용하고 속담·격언·결말등을 섞는 것이 상례.
69년 절미운동을 제창한 박대통령은『외국인「파티」에 가서 양요리를 먹고도 집에 돌아와 밥 한 그릇을 또 먹어야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 말해 폭소.
안보문제를 설명하면서도 미국 「라이샤워」 교수의 논문을 인용, 『한국은 7O년대 전우기가 가장 어려운 고비』라고 했고 국제경제의 부와 빈의 남북현상에 대해서는 「노벨」상수장학자 「틴버겐」교수의이론을 소개.
유행어가 된 손자병법의 「유비무환」은 72년때 북괴의 침략을 설명하며 인용한 것. 일상적인 애국심 발로에 대해서는 『봄이 온 것을 구경하러 산과 들로 돌아다니던 사람이 집에와서 담밑에 핀 매화를 보고 비로소 봄을 느꼈다(춘일심춘부견춘, 귀내정전간구화)』(72년)란 당시를 소개하는가 하면 철인「니체」의 『집 앞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이 애국의 제1보』 (72년)란 것도 인용.
73년 회견때는 72년5월 이후락 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낼때의 비화를 털어놓으면서 삼국시대의 역사를 상기했다고 밝히고 『신라의 김춘추가 단신으로 고구려와의 협상을 위해 갔는데 억류해서 나중에 탈출했던 고사를 생각했다』고 회고.
민주제도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배격하면서 박대통령은 (75년) 『나는 지금도 끓이지 않은 우유는 못 먹는다. 먹어도 배탈이 난다』 는 신변일화를 첨가.
임진란을 앞둔 이율곡의 10만양병논이나 이에 앞서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 금성→두사람의상반된 일본국정보고도 인용되는 사화다. 수치풀이는 친절한 편이어서 『석유 1「배럴」은 1「드럼」보다 조금적은 0·8「드럼」』(74년)이라고 할 정도M. 회견이후 중계를 지켜본 육영수여사가 서거한 74년이후는 맏딸 박근혜양이 대역을 하고 있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라 할 수 있다ㅡ. <양태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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