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공표 된 한미 현안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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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동안 항간에 별의 별 얘기가 다 많던 한미간의 유감스럽던 사태가 28일 발표되었다. 정부가 국회 평화 통일 협의회에 보고한 한미 현안 문제는 이른바 박동선 사건과 청와대 도청 보도 문제, 그리고 김상근 참사관 문제 등 세가닥으로 요약된다.
지난 10월 하순부터 시작된 이번 사태는 양국간의 집중적인 외교 교섭 결과 외교적으로는 대체로 매듭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도 박동선 등에 대한 미국 국내의 사법적 절차는 그대로 남아 있어 모든 현안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아뭏든 이들 사건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갖가지 유언과 억측이 난비 던 만큼 뒤늦게 나마 정부가 사태의 개요를 밝힌 것은 다행스럽다. 국민의 알 권리란 차원도 차원이지만, 우선 정보의 단편성과 이에 부수되게 마련인 과장과 억측으로 인한 혼선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오랜 기간의 정보 차단은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 처리 과정에서 다행으로 생각되는 것은 한미 양국이 곧 이 사건으로 인해 전통적인 한미 우호 관계에 손상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과 자제를 다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이런 문제로 한미간의 전통적 우호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있을 수 없고, 군사 외교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협력 관계의 증진과 대한 방위 조약의 충실한 순수를 재차 다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미간의 흐트러짐 없는 기본 자세와 재다짐은 그 동안의 국민들의 걱정을 상당히 씻어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미국내의 관련 수사는 미국의 국내 문제로서 계속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미국 언론의 보도도 끊이지 않으리라 전망된다. 따라서 앞으로도 한미 양국 정부와 국민은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좀더 냉정과 자제로써 양국의 우호 관계가 서먹서먹해지지 않도록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박동선 사건·김상근 문제·청와대 도청 등 세가지로 집약된 한미간의 현안 문제는 그 가닥으로 보아서는 두개도 되고, 세개도 되고, 네개도 되지만, 결국 뿌리는 한가지, 미국 의회를 상대로 한 「로비」 활동으로 귀일 된다.
「로비」 활동을 하는 방법이라든가, 나서는 사람 등이 문제될 수는 있겠지만 「로비」 활동 그 자체를 나무라기만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국내외적으로 많든 적든 「로비」 활동은 있게 마련이고, 국내적인 「로비」 활동이 이념 단체의 이익을 증진시키려는 활동인데 비해 대외적인 「로비」 활동은 국가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미국과 같이 다원적이고 의회의 권한이 막강한 나라가 세계의 지도국이 되고 보면 도움을 받는 나라로서는 그 도움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 나름의 노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미국내의 「이스라엘·로비」라든가 「차이나·로비」의 명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자했다. 비단 「이스라엘」과 「차이나」의 「로비」뿐이겠는가.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나라 치고 대미 의회 「로비」 활동에 무관심한 나라는 없다고 보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 같이 주한미군의 유지와 미국의 대한 방위 공약에 국가 안보의 일익을 맡기고 있는 나라에서 미 의회 동향에 어찌 관심이 없겠는가. 가능하면 되도록 많은 사람을 한국의 친구로 맺어두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대미 외교에 대해 말마디 깨나한다는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정부간 외교만으로는 부족하니 의회 외교를 해야한다, 민간 외교를 해야한다, 국민 외교를 해야한다, 다층 외교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정이 그러했던 만큼, 우리 처지에서 보면 대미 의회 「로비」 활동은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타국의 대미 의회 활동이 꼭 나쁜 일로 매도해야 옳은 일인가. 물론 타국의 「로비」 활동이 미국의 국가 이익을 희생시키는 일이라면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미국의 우방인 한국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주한미군과 미국의 대한 방위 공약의 유지를 위해 미 의회를 상대로 그 나름의 노력을 했다면 그것이 결코 미국에 해를 끼치려는 의도라거나, 해를 끼쳤다고만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적어도 악의는 없었고 선의에서 출발했다는 것만은 미국 국민도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고 출발이 선의라고 해서 모든 행동의 전 과정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에 보도된 과정을 보면 일부 미 국민의 불쾌감도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국과 미국, 더 크게 보면 동서양의 문화와 관습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너무 모자라지 않았나 하는 측면이 많이 눈에 뛴다. 「워터게이트」 사건이래 정치의 도덕성과 청렴성이 전에 없이 강조 되고 있는 미국의 새로운 정치 사회 풍토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더구나 박동선이라는 쌀 중개 상인 미국 교포가 「로비」 활동을 혼자서 대항하는 양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일이었다. 박의 행상이 정부와 무관하다 것은 이미 정부가 분명히 밝힌바 이지만 어떻든 일이 좀 어처구니없게 되긴 했다. 이에 더해 김상근 참사관의 이른바 보호 문제는 더욱 맹랑하다. 정부의 발표로는 내용이 아리송하긴 하나 전에도 없지 않았던 외교관의 타기 할 배신 행위다.
정정과 환경이 다른 선진국에 오래 근무하다 그 분위기에 현혹된 것일 수도 있겠고, 일을 잘못 처리한데 대한 문책을 겁내 오히려 이를 합리화하는 구실을 찾는 영악한 행동일수도 있겠다. 미국 정부가 그 행동의 자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우리측의 면회 요청에 소극적인 것은 불쾌한 일이나, 그런 자를 외교관이라고 믿고 외국에 보낸 우리의 실책에 대한 자생도 없어선 안되겠다.
이 사건을 보면서 새삼 다짐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한미간 특별한 유대와 친선 관계다. 이번 사건이 한미 관계에서 비온 뒤에 땅이 굳는 격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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