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긴급 진단

세월호 비극, 울분 장애냐 외상후 성장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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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강일구]
한창수
고려대 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쟁·대형 화재·자연재해나 각종 폭력 등 생명이 위협당하는 재난을 겪으면 사람들은 신체적인 외상뿐 아니라 정신적·심리적으로도 심각한 외상을 입는다. 재난 당시나 직후에는 정신이 나가고, 극심한 긴장에 시달리다 멍한 상태가 되는 소위 ‘멘붕’ 상태에 빠진다. 이때는 다치거나 피가 흘러도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른 뒤 오히려 가슴이 뛰거나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해지는 때가 있다. 혼자서 조용히 있을 때면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나 무서워지기도 하고, 작은 소리나 자극에도 예민해진다. 이를 ‘급성스트레스 상태’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학업과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가끔씩 감정이 북받치거나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가 겉으로는 건강한 것 같아도 ‘이전처럼 잘 살지는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그중 재난 후 한 달 이상이 지나도 사고 당시의 일들을 꿈이나 기억으로 재경험하거나, 감정적으로 마비되는 증상이 지속되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의심해 봐야 한다. 이런 증상은 6개월 이상 만성적으로 지속되는 경우도 있고, 처음에는 괜찮았다가 수개월이 지난 이후에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큰 재난을 맞아 역경을 이겨내고 더 큰 인물로 우뚝 서는 경우도 많이 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거나,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큰 인물이 되는 경우다. 이를 일컬어 ‘외상후 성장’이라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남들이 걸려 넘어진 돌부리가 누군가에게는 더 큰 세상을 향한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심리적 외상 이후 누가 성장하고 누가 스트레스장애에 걸리는가는 개인의 심리적 회복력(신경 탄력성)에 달려 있다. 당기면 길게 늘어났다가 놓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고무줄처럼 심리적인 회복을 얼마나 잘 하느냐는 개인의 타고난 체력과 성격, 가족과 주변 환경 등에 의해 달라진다. 타고난 것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의 지지와 주변 환경, 마음을 성장시키려는 수련 등은 노력으로 가능한 것들이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사회는 대형 재난에 따른 ‘사회적 외상후 울분장애(Embitterment disorder)’에 신경을 써야 한다.

외상후 울분장애는 과거 독일 통일 이후 동독인들에게서 대두된 심리 상태가 대표적이다. 경제적으로는 더 잘살게 되었지만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사회적 불균형과 불공정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와 화가 쌓여간 것이다. 만약 감정에 상처를 주고 울분을 느끼게 하는 일을 경험했거나, 생각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화가 나고 스스로를 우울하고 불행하게 하는 생각이 반복된다면 울분장애를 의심해야 한다. 울분이란 ‘장기간 부당하게 취급받아 왔기 때문에 증오 및 분노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울분장애 환자들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울분·분노·무기력감이다.

 우울증과 불안증은 약물치료와 정신심리 치료를 통해 많이 회복되지만, 울분은 훨씬 오래 지속되고 약으로도 잘 치료되지 않는다. 정신치료와 지혜 치료 등으로 꾸준히 마음을 보듬어서 상처가 아물게 하고, 스스로의 마음이 그 과정에서 성숙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다.

울분을 그냥 놔두면 사회를 향한 폭력으로 폭발하기도 하고, 그 분노를 자신에게 돌리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특히 이번 세월호 참사처럼 천재지변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사회 시스템으로 비극이 증폭될 경우 사회 구성원들은 집단적으로 불신과 분노를 느낀다. 불신이 누적되며 울분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를 치유하려면 신뢰 회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 사회가 예전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슬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자칫 불신과 분노가 그대로 축적되고 이로 인해 ‘사회적 외상후 울분장애’에 빠지게 될 수 있다.

이를 피하려면 문제 해결 과정에서 다른 목적을 노리는 사람이나 집단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부터 막는 게 중요하다. 즉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사태를 해결한답시고 앞장설 경우, 사회 조직원들의 울분은 더욱 축적된다. 치료의 첫 단계는 선한 마음과 애틋한 공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힘을 모아 당면한 심리적·사회적 외상을 극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나대는 사람들의 욕망부터 절제시키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직업윤리, 사명감을 갖고서 대의명분에 헌신하는 선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사태 해결에 앞장서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회 구성원의 울분을 줄이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더 나아가 건강한 윤리의식을 재조명하고 사회적 인격 성숙을 위한 운동을 조직한다면 세월호의 비극은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대형 재난이 외상후 질환으로 엇나가는 게 아니라 한 사회의 성숙으로 이어진 역사적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도 그런 갈림길에 서 있다.

한창수 고려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