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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총리, 사고 수습에 직을 걸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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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2008년 5월 12일 오후 2시28분 중국 쓰촨(四川)성에서 규모 8.0의 초대형 지진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망·실종자가 8만7000여 명에 달하고 중상자만 37만 명이 넘는 대참극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의 2인자였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지진이 발생한 지 2시간 만에 베이징에서 쓰촨행 비행기를 탔다. 늦은 밤 현장에 도착한 원 총리는 안전모를 쓰고 확성기를 든 채 폐허가 된 건물을 누비며 구조 작업을 독려했다. 지진 이튿날 원 총리가 고아가 된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울지 마라. 내가 원자바오 할아버지야. 정부가 너희들을 집에 있는 것처럼 보살펴주마”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국영방송 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중계됐다. 원 총리의 헌신적 자세에 감동한 중국 국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흉흉한 민심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대재난을 ‘다난흥방(多難興邦·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뒤 나라가 부흥함)’의 계기로 반전시킬 수 있었던 데엔 원 총리의 공이 매우 컸다. 비단 그때뿐 아니라 재임 기간 내내 허름한 점퍼와 운동화 차림으로 민생·재난 현장을 누비는 건 원 총리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냉정히 보면 원 총리의 행보를 공산당식 프로파간다(propaganda·선전활동)로 깎아내릴 수도 있다. 퇴임 후 원 총리의 가족들이 거액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그의 ‘서민 총리’ 이미지가 타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재난 시 민심 관리의 요체를 꿰뚫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지도자는 언제나 낮은 자세로 현장에 나가 고통받는 이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한 우리 정부의 미흡한 대응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여러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총리의 존재감 부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밤중에 진도 현장으로 달려갔다가 물세례 봉변까지 당한 정홍원 총리 입장에선 억울한 지적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총리까지 현장에 내려갔다면 관계 부처들이 일사불란하게 돌아가야 기본인데 현장에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불만이 빗발쳤던 건 무슨 영문인가. 사고 직후 안전행정부와 해양경찰청이 따로 놀면서 기본적 통계부터 오락가락했다. 사고가 발생한 지 59시간이 지나서야 범부처 기구가 꾸려졌지만 이미 정부의 신뢰도엔 금이 간 상태였다. 정 총리가 애초부터 직을 거는 자세로 적극적으로 나서 사고 수습을 틀어쥐는 게 옳았다.

 민심 관리에도 큰 허점을 드러냈다. 총리가 명색이 정부의 2인자인데 유가족들이 얼마나 못 미더웠으면 직접 청와대와 상대하겠다고 나섰겠나. 또 그런 유가족들을 경찰이 막아서며 ‘유가족 vs. 공권력’의 구도를 연출한 건 관료주의 행정의 극치다. 정 총리를 비롯한 진도 현지의 고위직들은 실종자 가족의 눈물을 닦아준 말단 여경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