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1)<제자·김은호>|제52화 서화 백년 (87)|이당 김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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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 화가>
개성이 낳은 황종하·성하·경하·용하 4형제는 모두 이름 있는 서화가들이다. 이들은 벽암 황석일 공의 아들로 똑같이 네살 터울이다. 장남인 우석 (인왕산인) 황종하 (1887∼1952년)는 호도를, 2남 우청 황성하 (1891∼1965년)는 산수를, 3남 국촌 (청몽) 황경하 (1895∼?)는 서예를, 4남 미산 (등운) 황용하 (l899∼?) 는 사군자를 잘했다.
이 4형제 중에서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이 2남 우청이다. 3남 국촌과 4남 미산이 6·25 사변 통에 행방 불명되었다. 미산의 작품은 지금도 여러 곳에서 자주 대할 수 있지만 특히 그의 국화는 유명하다.
미산은 「선전」 2회부터 23회까지 특·입선을 여러 차례 했으며 무감사로 출품한 일도 있다.
이를 4형제는 1921년에 군산에서 「황씨 사형제전」을 열었다. 23년에는 서울 미술 구락부에서 또 한번 「황씨 사형제전」을 벌여 호평을 받았다. 26년에는 미산이 일본 동경 화족 회관에서 사군자전을 열었을 때 형제들이 모두 찬조를 통해 이채를 띠었었다.
26년 맏형 우석이 마산에서 호도전을 열었을 때도 형제가 나란히 출품했었다.
나보다 1년 연장인 우청은 지두화 (손가락 끝으로 그린 그림)의 명인이다. 산수·인물·영모·화조·신선도 등 안한게 없지만 특히 산수가 좋았다. 글씨도 청의 하소기체를 본받아「선전」에 서예가 입선한 일도 있다. 전각도 잘해 자기가 쓰는 도장은 손수 파서 썼다.
유·불·선 3교를 깊이 공부하여 집에서도 조석으로 불경을 욀 정도였고, 선교에 심취해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작품도 많았다.
생활이 검소하고 손재주가 있어 책장을 자신이 만들었다.
방랑벽이 있어 8년 동안이나 집을 비우고 팔도강산을 두루 유람했으며 만주·중국 등지도 여행했다.
낙천적이고 호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을 대하는 품이 퍽 소탈해 친구도 많았다. 한다는 애주가여서 우청 곁에는 항상 술이 붙어 다녔다.
그가 개성에 서화 연구소를 차렸을 때는 원로 연극 배우인 복혜숙 여사 같은 사람이 배우러 다녔다. 김인승 김용제 교수는 개성에서 우청에게 배운 제자들이다.
38년, 제4회 일본 서도 전람회에 그의 장기인 지두화 『월조간송』이 특선, 상을 받았다.
화제를 왕유의 시구에 나오는「명월송간조 청천석상류」라고 써서 인기를 끌었다.
이 그림은 지금 김인승 화백이 애장하고 있다.
39년, 제1회 조선 서도 진흥회에는 계호필 (닭털로 만든 붓)로 그린 『임정추의』가 입선되었다.
이 그림은 「의예 운림화법」이래서 아들 황극선씨 (불란서 무역 공사 총무 부장)가 애지중지하고 있다. 영국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우청의 「호도」는 대영 박물관이 간행한 책자에도 소개되어 있다.
도산 안창호·춘원 이광수의 개성 내방 (28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청이 개성 대성관에서 개인전을 연 일도 있다.
환도 후인 54년부터 이때 김활란 총장이 주선해서 만든 「김란묵회」에 우청과 나는 지도교수로 나갔었다. 한달에 한번씩 모이는 김란묵회에는 영운 김용진·송은 이병직·청전 이상범·소정 변관식·공정 김윤중·김활란·김인승·김용제 제씨가 참석했다.
좀 오래된 여류 화가 중에는 내게 배운 숙당 배정례씨와, 해강에게 배운 혜연 방무길씨, 춘천 (이영일)에게 배운 정찬영씨 등이 있다.
숙당은 영동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 배성린이 내게 보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배성린은 전라도에서 여러골 군수를 지냈는데 나와 앎이 있어 자기 딸이 그림 재간이 있다고 내 문하에 들여보내 그림을 가르쳤다. 숙당은 후소회 남자 회원들 틈에 끼여 홍일점으로 화재를 닦았다. 그는 1939년 제2회 후소회 전부터 계속 출품,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화필을 휘둘렀다.
혜연은 서울대 의대 학장을 지낸 의학 박사 이갑수의 부인이다. 송금선씨와는 숙명여고 동기동창간이다. 그는 사군자를 잘 그리고 행서·초서를 특히 잘 썼다.
금강산 내금강에 있는 「오십이불암」이란 글씨는 혜연이 쓴 것이다.
「선전」에서 여러 차례 특·입선해 기염을 토한 여류 학자 정찬영씨는 춘천에게 배운 유일한 제자다.
춘천이 숙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기 때문에 학교의 제자는 더러 있지만 문하에 와서 직접 배운 사람은 정찬영씨 한 사람뿐이다. 정씨는 여류지만 붓끝이 힘차 웅장한 그림으로 평가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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