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대변인은 '말 기술자'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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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대통령은 입이 두개라고 한다. 그 자신의 입 말고도 대변인의 입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사람이므로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무슨 말이라도 불쑥 내뱉을 수 있다. 또 개인적으로 아무리 유능해도 모든 국사에 다 능통할 수는 없다. 그래서 대변인이라는 대역(代役)을 두고 여과 과정을 거친다.

대통령이 국민 앞에 이런저런 소회를 가감없이 털어놓으면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친근감도 간다. 그러나 국가경영은 좀 차원이 다르다.

나라 안팎으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사안일수록 최종조정자로서 대통령은 말을 아껴야 하고, '악역'은 아랫사람들에게 맡기는 쪽이 국익에 도움될 때가 많다. 말은 한번 뱉으면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변인 제도가 있고, 같은 내용이라도 스핀(회전)을 먹여 표현을 순화시키는 '스핀 닥터'(spin doctor.언어교정 의사)라는 전문직도 생겨났다. 대변인은 '말의 기술자'가 아니다.

꾸준한 대화와 교감을 통해 대통령과 그 정책을 국민들에게 이해시킨다는 뜻에서 '소통책임자'(communication director)로 불린다. 그래서 갈수록 전문직화하고 대통령이나 장관이 바뀌어도 대변인은 그대로 두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변인의 프로페셔널리즘에 하나의 표준을 확립한 사람으로 말린 피츠워터 백악관대변인이 곧잘 꼽힌다. 1982년부터 92년까지 10년간 레이건과 부시 두 대통령의 입노릇을 했다.

대머리에 배가 불룩 나온 그의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정직하고, 접근이 편하고, 누구보다 정보에 정통해 언론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정보를 요구하는 언론과 공개를 꺼리는 관료들 간의 중재자가 바로 대변인이라며 대변인이 해선 안될 일을 '10계명'으로 남겼다.

어쩔 수 없이 '쉬쉬'해야 할 경우에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가 그 첫째다.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 말라가 둘째다. 입을 열 때는 항상 대통령의 말임을 잊지 말고, 모든 것에 정통하도록 백악관 관리들을 상대로 기자 이상으로 열심히 취재하는 것을 잊지 말라가 셋째와 넷째다.

대통령 곁을 떠나서는 안되고, 유머감각을 잃지 말며, 언론을 미워하거나 따돌리지 말고, 언론을 적극 활용하며, 관리와 기자들 간의 중재역할은 공격적으로 하라는 당부였다.

참여정부 출범 한달여가 지나도록 대통령에서부터 부총리.장관 할 것 없이 부적절하고 정제되지 않은 말들로 설화(舌禍)가 그칠 날이 없다. 정부 자체내 여과시스템이 작동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자들에게 밥사고 술사고…' '일부 언론의 시샘과 박해…'등 차마 활자화되기 어려운 말들이 여과없이 전파를 타고 있다.

고심 끝에 이라크파병의 용단을 내렸다면 '국익차원의 전략적 선택'같은 궁색한 군더더기는 왜 필요한가. 대외관계에 관한 말일수록 언어의 '전략적 선택'이 중요하다.

기자들의 사무실 방문 취재를 금지하고 뉴스브리핑제를 도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옳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대변인과 브리핑시스템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참여정부의 의사결정이 사전 시나리오에 의존 않고 난상토론에 흐를수록 가닥을 잡아 교통정리해주는 대변인 기능은 더욱 중요하다. 부실한 내용을 포장을 그럴 듯하게 해 전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국가경영의 언어는 품위와 격을 갖춰야 한다. 청와대에 한방주치의도 초빙됐다고 한다. 다른 이런저런 고문이나 특보보다 대통령에게 후보시절의 언어들을 순화해주는 '말의 주치의' 스핀 닥터가 더 절실한 것 같다.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