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대토론…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왕건과 고려 창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 창업주의 면면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창업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들라면 아마 왕건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기야 역대 왕조의 창업주라고는 하지만 삼국이나 그 이전 왕조의 창업주들은 모두 신학적인「베일」속에 싸여있기 때문에 그들의 인물을 논할 만한 구체적 사실들을 거의 모른다는 것이 정확한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에 와서 새 왕조를 세운 궁예·견훤 및 왕건과 조선왕조를 건설한 이성계의 네 명으로 압축되는 셈이다. 그러나 궁예나 견훤은 뒤에서 다시 언급이 되겠지만 도저히 왕건을 따를 인물이 되지 못한다.
이성계도 또한 여러모로 봐서 왕건과 비교되기에는 많은 결함을 지니고 있다. 만일 왕건이「덕」으로서 건국을 하였다면 이성계는「권모술수」로써 새 왕조를 건설했다는 평을 종종 받아 왔다. 이것이 반드시 그들의 전모를 말하여 주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평을 들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의 학자들은 보통 왕건을 송의 건국주 조광윤과 비교, 오히려 왕건을 추켜세우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조의 학자들이 이성계에 대한 존경심을 깊이 가지지 못했던 것과도 대조가 된다.
그러면 왕건이 새 왕조를 건설하고, 그 뿐이 아니라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민족의 통일을 이룩, 통일민족으로서의 굳건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왕건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고 이에 대처하는 현명한 정치가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머릿속에 두고 우리들의 토론은 진행됐다.
2, 호족의 지배 시대
위와 같은 관심에서 출발한 우리의 대화는 자연히 먼저 왕건이 살고 있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왕건이 살고 있던 후삼국시대는 한마디로 호족의 시대였다. 그러면 성주로서 대표될 수 있는 호족이란 어떤 존재였는가.
중앙귀족들 중에서 정치적인 권력투쟁에 밀려 지방으로 낙향한 뒤 그 지방의 호족으로 성장한 자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호족의 가장 대표적 존재는 그 지방 촌주 출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중앙정부로부터 임명돼 파견된 군태수나 현령을 제치고 지방에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중앙정부에서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명칭을 지닌 통치기구를 갖추고, 행정·재경·군사권을 독자적으로 지배하였으며, 점점 학문적 교육에까지도 관심을 나타냈던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이들 성주들은 보통 자기의 근거지에 성을 쌓고 그 주인을 자처하여 성주라 칭했다. 성주라는 용어는 오랜 옛날 삼국시대 초기에도 사용되었으나, 그 속에는 독자적인 군사적 지휘자의 뜻이 강했다. 이 시대의 성주는 그러한 면을 더 강하게 지니고 있어서 사병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태였으므로, 비록 수도인 경주에 신라의 중앙정부가 여전히 존재해 있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들 호족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 되었다. 호족들 중에는 한때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하려는 꿈을 지닌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골품제의 제약으로 인해 이것이 가망 없는 일임을 안 이후, 그들은 자기들의 근거지에 확고한 기반을 닦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결과 신라의 중앙정부는 거의 허몰의 것이 되고, 지방 호족들에 의해 천하의 대세가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3, 육·해군력 갖춰
왕건도 이러한 호족출신이었다. 호족으로서의 왕건의 세력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는가에 대하여는 반드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가 건국을 하게된 것은 호족으로서의 세력 배경보다도 그의 개인적인 역량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과, 그와는 반대로 송악지방에 있어서 오랜 전통을 이어 오고 또 주변의 여러 호족의 지지를 받는 비교적 큰 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이러한 의견의 대립에도 불구, 그가 호족출신으로서 당시의 사회적 지배세력인 다른 호족들과 친근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중요한 점이 아닌가 한다.
특히 왕건은 신라의 변방에서 자라났었다. 송악에서 가까운 평산의 패강진에는 변경을 지키는 육군이 있었는데, 이 패강진의 군사력은 강력한 왕건의 지지자였다. 또 강화의 혈구진에 있던 해군력도 왕건과 가까운 사이에 있었다. 뒤에 왕건이 궁예의 부장으로서 육군을 거느리고 경기도 일대를 휩쓸고 해군을 거느리고 나주지방을 공략하는 일 등은 모두 이러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고 이루어졌다.
왕건은 특히 해상무역으로 인해 재부를 저축한 호족세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시 호족들 중에서 특히 청해진의 장보고라든가, 진주지방의 왕봉규의 행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혈구진도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추측된다.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리라고 추측되는 왕건의 선조가 용궁에 가서 보화를 가져왔다는 전설이 전하는 바와 같이 왕건은 무역에 의한 재부를 축적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세력을 성장시키는 하나의 뒷받침이 되었으리라고 믿어진다.
4, 풍수지리 믿고
왕건은 그러나 신라의 뒤를 이어 순조롭게 새 왕조를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라에 대항하여 일어난 태봉의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새 왕조 고려를 건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적대적인 견훤의 후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계속한 결과 이를 멸하고 드디어 후삼국의 통일에 성공하게 됐다. 그러므로 왕건이 어째서 새 왕조의 창업주로서 민족의 재통일에 성공했는가 하는 점은, 그를 궁예 및 견훤과 비교해 봄으로써 더 잘 이해되리라고 믿는다.
후삼국시대는 호족의 시대였다고 위에서 지적하였지만, 그런 만큼 궁예나 견훤도 이들 호족과의 연합 속에서 그들의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이 그들과 연합하고 있는 호족을 대하는 태도는 동일하지가 않았다.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성격적인 차이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궁예는 원래 신라의 왕자였지만 정권투쟁에 몰려 사원에 은신하였다가 도적의 무리에 투신하였었다. 비록 그가 사졸들과 고락을 같이 하여 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의 군사력은 토착민보다 유민들로써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회적 기반이 확고하지를 못했다. 이 때문에 궁예는 그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였다. 또 신통력으로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많은 신하를 희생시켰다.
말하자면 전제군주적 경향을 뚜렷이 하였고, 드디어는 폭군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그가 호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는 눈앞의 권력만을 생각했지 역사의 대세를 보는 큰 안목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궁예가 결국 축출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견훤은 농민출신인 듯하며, 군인으로 출세, 서남해 지방의 군진에서 그 군사력을 토대로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도 역시 강력한 토착세력의 배경을 갖지 못한 듯하다.
여기에는 이견도 있기는 하나 그가 후백제를 세운 뒤 고집 센 전제군주로 행세한 것은 이 같은 점에 원인이 있는 듯하다. 결국 이러한 그의 성격이 자기 스스로의 종말을 촉진한 것이다. 즉 그는 왕위 계승의 일반적인 원칙을 무시하고 네째 아들을 계승자로 지목하였다가 그것이 화근이 되어 아들에게 쫓겨나서 적인 왕건에게 스스로 항복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송악에 전통적인 자기의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건국한 뒤에는 여기에 국도를 정하였다. 그는 이 송악이 삼한을 통일할 위대한 영웅 탄생의 명당이라는 풍수지리설을 굳게 믿었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의 정변으로써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왕건이 지방의 호족들과 성의로써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기가 국왕인 데도 불구, 지방의 호족들을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그 협조를 얻기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처음 그가 국왕이 되었을 때에는 흔들리던 호족들과의 협력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많은 호족들이 자진해서 왕건에게 항복해 왔다. 이리하여 신라는 물론 후백제도 지배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드디어는 고려가 통일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가 통일에 성공한 것은 그가 호족들의 인심을 얻은데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왕건을 역사의 대세를 현명하게 이해한 정치가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5, 비판세력 흡수
왕건은 궁예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계승자로서 자처하였다.
이것은 그가 건국한 지역이 옛 고구려의 당이었고 저기에 사는 사람들이 신라에 대해 품고 있는 반항심을 의식한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견훤이 백제의 계승자로 자처한 것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궁예나 견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신라에 대한 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궁예는 신라를「멸도」라 부르고 항복해 오는 신라인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견훤은 경주를 습격, 국왕을 죽이고 진보와 무기를 약탈해 왔었다. 그러나 왕건은 이와는 달리 신라에 대해 퍽 우호적이었다. 왕건은 훗날 경주를 방문, 경순왕과 서로 만나게 되는데 이때 그는 군대를 거느리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인으로부터 부모를 대함과 같다는 칭송을 들었다 한다. 이러한 결과 왕건은 경순왕 스스로의 항복을 받아 신라를 아우를 수가 있었다.
아마 왕건은 신라의 대립자일 뿐 아니라 그를 포용한 자로서의 지위를 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신라의 중앙귀족 내부에서 싹터 나오던 골품제에 근거를 둔 구체제에 대한 비판세력은 왕건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인 최치원이나 그 제자들이 그러하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최승로는 뒤에 고려의 새로운 정치이념을 확립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하였었다.
왕건은 또 발해의 유민을 환영하여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들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한 왕건이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의 유민을 동족의식을 갖고 맞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발해의 세자였다는 대광현에게는 왕계라는 성명을 주고 종적에 편입시켰다. 이리하여 신라의 통일이 반도 안에 국한되고 고구려 유민의 발해와 대립하여 이루어졌던 남북국의 형세는 고려에 의해 해소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발해의 영토는 그 대부분이 계단에 의하여 점령되어 버리긴 하였으나 민족에 있어서는 통일이 더욱 완전해졌고 따라서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왕건이 계단을 짐승의 나라라고 하여 이를 심히 적대시한 것은 이러한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왕건은 최후까지 군사적으로 적대해 있던 후백제와 그 유민을 천대한 듯하다.
그는 죽을 때에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에서 후백제 지방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주 오씨의 몸에서 태어난 혜종을 왕위 계승자로 삼았고 견훤으로 하여금 자진 항복해 오게 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를 극히 우대하였다. 심지어는 후백제를 멸한 뒤에 신검 등에게까지 관후한 대우를 하였다. 왕건이 권모술수나 무력으로써가 아니라 덕으로써 천하를 통일했다는 말을 듣게 되는 까닭이 이러한 데에도 있다.
이같이 왕건은 적대하는 정권을 단순히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귀부를 받음으로 해서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성공하였고 또 민족의 통일을 더욱 굳게 하였다. 이 점이「신라의 통일」이 아니라「고려의 통일」로써「민족의 통일」을 삼으려는 의견이 나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6, 관용으로 일관
왕건은 송악지방의 호족출신이었다. 그는 성주로서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 출세하여 궁예의 부장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건은 장군으로서 보다 오히려 정치가로서 더 위대하다. 그리고 그의 정치가로서의 위대성은 한마디로「포옹력」에 있었다고 할 수가 있다. 궁예나 견훤이 자기 고집과 자기 욕심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전제군주가 되어 몰락한데 대해 왕건이 궁예를 축출한 부장들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건설하고 드디어는 통일을 이룩한 과정은 곧 그의 관용 정책의 결과였다.
이러한 정책은 그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호족들에게 가장 잘 발휘되었다. 그는 국왕의 지위에 있었지만 지방 호족들을 겸손한 말로 대하였고 때로는 그들에게 자기의 왕성을 주어 의제 가족적인 관계를 맺거나 혹은 혼인을 통해 인척 관계를 맺음으로 해서 유대를 굳게 하였다. 흔히 호족연합 정책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정책이 왕건의 정치적 성공의 열쇠였던 셈이다.

<참석자>
대표집필 이기백 민현구<한국사·국민대 교수> 이기백<한국사·서강대 교수> 이우성<한국사·성대 교수> 하현강<한국사·이대 교수><가나다 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