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해훼리호는 정원 초과 악천후 출항, 남영호는 화물 초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는 20여 년 전 전북 부안군 위도 근처 해상에서 침몰한 서해훼리호 사고를 연상케 한다. 현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사고 원인과 피해 규모 등에서 유사하다는 것이다.

 서해훼리호는 1993년 10월 10일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출항에 나섰다. 그러나 3~4m에 이르는 높은 파도 때문에 운항이 어렵게 되자 위도로 회항하려고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선체가 한쪽으로 쏠리며 전복됐다. 정원 221명에 불과한 배에 360여 명이 승선했고 292명이 사망했다. 선박의 항로를 결정하는 항해사가 휴가로 탑승하지 않았고, 안전요원이 단 두 명에 불과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예견된 인재(人災)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안전 불감증이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87년 6월 경남 거제군 남부면 다포리 해상에서 관광객 86명을 태우고 해금강 관광 뒤 통영으로 돌아가던 목조유람선 ‘극동호’가 화재로 침몰했다. 27명이 사망하고 8명이 실종됐다. 기관실 엔진 과열이 원인이었다. 비싼 선박용 엔진 대신 값싼 중고 버스용 엔진을 사용한 게 화근이었다. 사고 유람선의 기관사는 무자격자였고, 엔진 고장도 잦아 사고 한 달 전에도 엔진을 수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70년 12월 제주 서귀포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가던 중 침몰, 323명의 사망자를 낸 ‘남영호’ 사고 역시 전형적인 인재였다. 남영호는 당시 선령 2년에 불과했지만 사람과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다. 302명이 정원인 선박에 338명이 탑승했다. 화물도 적재정량의 네 배인 160t이나 실었다. 당시 해양경찰은 남영호가 침몰 직전 발신한 긴급구조신호(SOS)를 수신하지 못했다. 일부 승객은 영하의 바다에서 동사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73년 12월 여객선 운항관리제도가 도입됐다.

 사상 최악의 해외 선박 침몰 사고는 87년 필리핀 해상에서 발생했다. 여객선 도나파즈호는 8800배럴의 가솔린을 싣고 가던 유조선 벡터호와 충돌했다. 직후 유조선에서 발생한 화재는 여객선으로 옮겨 붙었고, 도나파즈호는 2시간 만에 완전히 가라앉았다. 충돌 8시간 후에야 사고 사실을 확인한 필리핀 당국은 약 1500명이 승선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생존자들은 4000명 이상이 배에 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필리핀 대법원은 사고 12년 후 도나파즈호가 4000명 넘는 승객을 태우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살아남은 이는 26명뿐이었다.

 영화로 제작된 ‘타이타닉호’는 1912년 4월 영국 사우샘프턴을 출발해 뉴욕으로 가던 중 빙산과 충돌해 침몰했다.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이 숨져 당시로는 최대의 해양 사고였다. 이를 계기로 배의 구조와 구명설비·무선설비 등에 대한 국제적 기준이 마련됐다.

홍주희·채승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