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륜 첫 영광…양정모의 수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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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드디어 고국땅에 도착했다. 비행기「트랩」을 정신없이 내려와 수많은 환영객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나는 몸이 사르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긴장이 풀려 몸을 가누질 못할 지경이었다.
「오픈·카」로 시청앞까지 질주하는 동안 그제서야 제정신이 나면서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연도의 수많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내가 목에 건 이 금「메달」은 여러분의 것입니다』라고 여러번 되뇌었다.
시청앞 환영대회에서 이규도씨가 애국가를 불렀을 땐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몬트리올」하늘밑에 휘날린 태극기와 울려 퍼진 애국가가 다시 눈에 떠올랐다. 이틀 전이었으나 이젠 아득한 옛날만 같다.
그날은 내 생애에 가장 길고 뜨거운 날이었다.
1976년7월31일 밤8시45분(현지시간·한국시간 8월1일 상오9시45분)은 나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한국「스포츠」에 새로운 이정표가 펼쳐진 시간이기도 해서 나는 자부심도 느끼고 있다.
수많은 교포들의 『대한민국만세』와 함께 「모리스·리처드」체육관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치 못했다. 초강국 미국의 성조기를 옆에 거느리고 가운데 우뚝 솟은 태극기를 바라보니 가슴이 뭉클해 옴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엄하신 아버님의 얼굴이 얼핏 나타나기도 했다.
이날의 영광을 위한 9년이라는 인고의 긴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기도 했다.
몽고의「제베그·오이도프」와의 대결은 나의 일생일대를 건 한판의 승부였다. 어쩌면 한국인과 너무 흡사해 친근감마저 느끼는「오이도프」는 숙명의 「라이벌」이다. 「테헤란」선 이겼으나 「민스크」에서 패한 빚을 깨끗이 갚을 생각이었다. 그와 나는 상대를 서로 잘 알았다.
팔이 길고 키가 큰 그가「아웃·복서」라면 나는「인·파이터」형으로 흔히 비교됐다. 나의 맹렬한「태클」에 그가 달려드느냐에 승패는 달려있는 것이다. 「오이도프」와의 최종 결승전에 나선 나는 5일 동안의 체중조절로 「컨디션」은 아주 나빴다. 그러나 중량조절은「오이도프」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용솟음쳤다.
7점 이하로만 패해도 우승할 수 있는 여유마저 생겼으니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1「라운드」는 적극적인 공격을 피하라는 「코치」진의 지시도 있어서 수세에 몰리다가 5-1로 크게 뒤졌다. 2「라운드」에 들어 적공을 취하기로 했다. 약간 방심한 그에게 나의 장기인「사이드·태클」과 함께 들어 메치기를 시도했다. 그가 끝내 걸려들고 말았다. 6-5로 바싹 쫓았다. 최종3「라운드」에 들어가 뒷다리 들어 돌리기가 성공되어 드디어 8-6으로 역전 「리드」를 잡았다. 1분만이었다 .나머지 2분 안에 「폴」로 패하지만 않으면 승리는 물론 금「메달」을 차지한다. 「벤치」에선 그대로 버티라고 아우성이었다. 일순 주춤하는 사이 그의 공격을 받고 8-8이 됐다. 계속 소극적인 자세로 버텼다. 다시 10-8로 역전 당하면서 곧 경기가 끝났다. 그가 승리하긴 했다. 그러나 나는 땀 닦는 것도 잊고 심판석만 주시했다.
승부는 판정패이지만 드디어 장내 「마이크」에서 1, 2, 3위의 성적이 발표됐다. 『「코리아」양정모 우승」』 순간 들떠 있던 우리 선수석은 모두 한데 엉켰다. 가슴과 다리가 떨려왔다. 내가 금「메달」을 차지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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