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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멱 감고, 고가도로 신기했던 … 청계천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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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청계천변에서 빨래하고 물장구치던 1960년대의 풍경. 청계천문화관은 11일부터 청계천의 변화를 담은 지도와 사진을 전시한다. [사진 청계천문화관]
1822년 제작된 한양도(漢陽圖)에선 개천(청계천)과 그 지류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다.

1930년대 서울에서 태어나 40~50년대를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서울토박이들은 청계천을 얘기할 때면 중학천을 떠올린다. 서울역사 구술자료집에 따르면 1932년 청진동에서 태어난 홍순하(82)씨는 “장마가 지면 중학천이 넘쳤다. 아이들은 목욕을 하고 남자들은 등목을 했고 밤늦게 여자들도 몸을 씻었다”고 말했다.

 관수동에서 나고 자란 고희구(79)씨는 “미국 대사관에 빨래터가 있었고 수표교에선 양잿물을 가마솥에 넣고 삶았다”고 했다. 1938년 출간된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는 “칠성네 아주머니, 빨래 삶는다지 않었수? 삶을 테건 어서 가져오슈. 인제 곧 솥이 날 모양이니”라는 청계천변 민초들의 대화가 담겨 있다.

 청계천은 북한산으로부터 흘러내린 여러 지천이 합류해 만들어진 개천이다. 그중 가장 큰 지천은 중학천이다. 1914년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경성부명세신지도’에는 삼청동 위쪽에서부터 흘러 경복궁 동편 건춘문(建春門)을 지나 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미국 대사관을 거쳐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중학천의 모습이 ‘파란 물줄기’로 뚜렷이 표시돼 있다. 당시의 중학천은 57년 도시 정비로 복개돼 사라졌지만 원래는 중학천-청계천은 하나의 물길인 셈이다.

청계고가가 세워진 70년대 모습. [사진 청계천문화관]

 11일부터 6월 1일까지 청계천문화관에서 열리는 ‘종이 위의 물길: 청계천 지도전’을 찾으면 이 같은 지도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청계천의 변화를 담은 지도 34점을 소개하는 전시회는 크게 4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조선시대 지도에 담긴 개천(開川·청계천의 옛 이름)을 조명한다. 한양의 산수지형과 개천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는 ‘한양도(漢陽圖)’, 영조시대 개천에서 준설 공사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수선전도(首善全圖)’ 등이 전시된다.

 2부에는 지금의 이름인 청계천(淸溪川)으로 명명된 일제강점기의 서울 지도가 전시된다. 당시 북촌(조선인 거주지)과 남촌(일본인 거주지)을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한 청계천, 복개가 시작된 지천의 모습이 담겨 있다. 3부에는 청계천을 복개하고 청계고가가 건설된 산업화 시대, 4부에는 다시 열린 청계천의 현재 모습을 담은 서울 지도가 전시된다.

 60년대 상경해 청계천변 판자촌에서 생활을 시작한 임성모(61)씨는 “엄마들이 빨래한 개천에서 애들이 뛰어 놀고 저녁이 되면 밥짓는 연기가 피어올라 연무처럼 자욱하던 청계천변이 기억난다. 70년대에는 고가가 세워졌는데 다들 신세계를 만난 듯 신기해했다”며 당시 청계천의 변화를 얘기했다. 청계천문화관이 전시하는 새서울약도(1970년)에는 청계고가의 사진과 함께 ‘한강의 기적: 불과 몇 년 사이에 서울이 이렇게 달라졌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당시 청계고가는 한국의 성장을 보여주는 홍보 자료로 종종 쓰였다. 외국 정부에서 손님이 오면 반드시 청계고가를 보여줬다고 한다.

 청계천문화관은 서울시 공보실이 57년부터 2002년까지 촬영한 청계천의 모습과 항공사진, 영상자료도 함께 전시한다. 역사박물관 관계자는 “청계천의 역사는 서울 600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며 “날씨 좋은 봄날 청계천변을 가족과 함께 걷고 개천의 끝자락에 있는 청계천문화관에 들러 청계천의 역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주말 나들이를 마무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계천문화관은 청계천 물길의 끝 부분인 고산자교와 무학교 사이에 위치해 있다. 전시회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다. 관람료는 무료고 월요일엔 휴관한다.

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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