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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4만 명 탄다 … '건축학개론' 그 버스 143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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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서울 시내버스 중 이용자가 가장 많은 노선은 정릉과 개포동을 오가는 143번 노선이다. 7일 시민들이 소공동 승강장에서 143번 버스에 오르고 있다. [김상선 기자]

“143번은 한 번 노선을 도는 데 왕복 4시간이 걸리는 버스이니 개포동까지 갔다 오시려면 화장실이라도 미리 다녀오세요.”

 지난 4일 오전 7시 북한산이 선명하게 올려다 보이는 성북구 대진여객 차고지에서 143번 버스에 오르자 버스기사 이규상(33)씨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버스는 성북구 정릉동에서 출발해 강남구 개포동까지 왕복 62㎞를 달린다. 143번 버스는 서울에서 이용객이 가장 많은 버스다. 서울시가 3월 26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이 버스의 하루 평균 이용객수는 4만1250명으로 다른 버스(1만968명)보다 4배나 많았다. 서울시내 360개 버스 노선 중 가장 ‘황금노선’인 셈이다. 143번 버스는 2012년 개봉했던 영화 ‘건축학 개론’에도 등장한다. “사는 곳에서 가장 멀리까지 가보라”는 교수의 수업 과제로 정릉에 살던 이제훈(이승민 역)과 수지(양서연 역)가 탄 710번 버스가 143번의 전신이다.

 차고지를 출발해 네 번째 정거장인 정릉시장을 지나자 버스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백팩을 멘 학생들과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직장인들이었다. ‘천도화’ ‘백일홍’ 등 약간 촌스러운 느낌의 간판이 보이는 미아리고개를 넘어 성신여대입구역에 도착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내렸지만 그보다 많은 직장인이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을지로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김현수(33)씨는 “이 버스는 항상 붐벼 맨날 서서 간다”며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그런 낭만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이제훈(이승민 역)과 수지(양서연 역)가 143번 버스(전 710번 버스)를 타고 정릉에서 개포동으로 이동하고 있다. [영화 캡처]

 143번 버스 승객은 대부분 짧은 거리를 버스로 이동하는 사람들이다. ‘건축학개론’처럼 정릉에서 개포까지 타고 가는 승객은 거의 없다. 짧은 단거리 고객이 많아 승객회전율이 높은 것이 황금노선의 이유다. 대진여객 이인호 상무는 “143번 버스 노선은 ‘장거리 선수’지만 이용하는 승객은 ‘단거리 선수’들이 대부분”이라며 “노선에 주거지와 직장, 주거지와 학교가 번갈아 가며 있는 게 승객이 많은 이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버스는 강북의 끝자락인 정릉에서 출발해 강남의 끝 쪽인 개포동까지 서울을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강남과 강북의 차이를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노선인 셈이다. 강북지역에선 정릉시장, 미아리 점성촌, 광장시장 등 오래된 풍경이 눈에 띈다. 시장에서 굽는 노릇한 빈대떡 냄새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서민적인 장소들이다. ‘건축학개론’에서 동갑인 서연에게 말 놓는 게 어려워 어버버거리는 정릉토박이 승민 같은 순박한 느낌이다.

 하지만 강남에 접어들면 명품가게가 즐비한 청담동, 고층빌딩이 늘어선 삼성역 등을 지난다. ‘집도 있고 차도 있는’ 강남선배 재욱처럼 화려한 모습이다.

 창밖 풍경처럼 버스에 타는 사람들도 다르다. 남산 3호 터널 주변이 ‘강북 직장인’과 ‘강남 직장인’을 나누는 분기점이다. 을지로에서 강북 직장인들을 내려준 버스는 남산터널을 지나며 청담·삼성 일대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태운다. 압구정역이나 청담역 주변에선 세련된 복장을 한 직장인들도 자주 눈에 띈다. 이태원 등에선 외국인 승객들이 버스를 자주 탄다. 24년째 143번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조봉현(46)씨는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 휑하던 강남이 지금은 고층빌딩이 즐비한 곳으로 변한 것처럼 143번은 서울의 발전과 함께 한 노선”이라며 “예전에는 강남과 강북의 승객이 뚜렷이 구분됐는데 지금은 강북이 개발되며 이런 차이도 서서히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143번 버스는 관광가이드북에 자주 소개되는 시내버스 노선이기도 하다. 강북의 인사동, 명동과 강남의 청담동, 압구정동, 코엑스 등 서울의 주요 쇼핑지를 모두 지나 ‘쇼핑하기에 가장 좋은 노선’으로 꼽힌다. 창경궁·정릉·종묘 등 문화재와 북한산·남산·청계천 등 다양한 관광지도 중간중간 볼 수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주말에도 이용객이 3만 명 정도 되는 인기 노선이다. 여행작가 권다현(33)씨는 “배차간격이 짧은 데다 서울의 주요 핫플레이스를 한 번에 연결해 여행하기엔 최적의 노선”이라며 “강북과 강남을 지나며 변하는 창밖 풍경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고 말했다.

글=안효성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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