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향은 존재의 빛 속에"|타계한 「하이데거」의 철학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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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0세기 철학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실존철학의 기수였던 「M·하이데거」가 26일 향년86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철학도의 한 사람으로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고인의 사상을 간단히 회고해 본다. [김종호<철학·성대교수>]
「하이데거」가 세계의 사상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38세의 저작이었던 『존재와 시간』이 세계철학계에 충격을 주면서부터다. 그는 이 저서에서 「실존」만을 연구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실존을 기반으로 모든 존재도 그로부터 해명하려 했다. 따라서 그의 태도는, 단지 외면적·객관적 인식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실존을 매개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데 있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이외의 모든 존재자는 다만 「존재적」일 따름으로 인간은 존재적인 동시에 존재론적인 존재자라는 것이다.
현대의 인간들이 소유하고 있는 학문은 실증적 과학이다. 과학은 존재자를 해명, 기술하는 학문이다.
존재가 존재자의 근거인한, 만약 존재의 의미가 분명해지지 않는다면 과학은 그것이 의거하는 기반을 잃게 된다.
그에 따르면 서양문화의 역사는 장기간에 걸친 「존재망각」의 역사다. 즉 존재자에 사로잡혀 존재 그 자체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야스퍼스」처럼 처음부터 초월자, 즉 신을 예상하지 않고 다만 인간적 현존재의 확립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현존재의 전체적 존재해조는 세계 내 존재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현존재는 평상시에 있어서는 우수를 지닌 존재라는 그 본래의 자격을 상실하고 다만 세인으로 퇴락하여 있다. 이러한 퇴락으로부터 본래의 자기로 돌아올 때 사람은 무에 마주치며 무에 마주치기 때문에 까닭 모를 불안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세상에 내던져져 세상과 교섭을 갖지 않고서는 살 수 없고, 그러면서도 죽음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걸머지고 수심에 잠겨야하는 존재, 이것이 「하이데거」 가 본 인간의 현존재였다.
『존재와 시간』『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등의 초기의 저서에는 불안을 통해 열어 보이는 무존재의 밑바닥에 가로놓인 근원적 무가 실존을 밑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년에 이르러서는 무의 심연에 직면한 보존대신에 존재의 빛 속으로 나온 실존이 강조되고, 존재에의 향수를 말하게 되었다. 존재는 진리의 본거요, 인간 본래의 고향이 된 것이다. 실존이란 아무런 거점도 없이 덮어놓고 자기를 미래로 향하여 내던지는 소위 실존이 아니라, 은폐에서 현존으로 향하는 존재자체의 움직임에 응하여 인간이 존재의 빛 속으로 나서는 것이요, 존재의 진리 속에 사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은 물론 자기를 미래로 향하여 내던지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어떻게 해서 자유냐고 물어봐도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자유는 근거가 없다.
인간자신이 자유로 일정한 세계를 기획한다기 보다 오히려 그렇게 하게끔 숙명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의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는데서 인간은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그리하여 존재의 빛을 깊이 성찰하는데서 우리는 인간 본래의 고향을 회복하고, 거기에 거룩한 「어떤 것」의 발자취를 찾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이데거」는 인간을 통로로 삼아 존재를 탐구, 무의 심연에 직면한 실존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무를 파악해 본 결과, 그것이 무가 아니라 실상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다시 무를 인간편으로 옮겨 놓으려 했다. 즉 존재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은 자기의 가슴을 공동처럼 비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존재와의 신비적 융합에 의해 보존의 불안을 벗어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독일 신비주의의 전통이 되살아나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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