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아니랄까봐 원산지까지 챙기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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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여성 속옷 제조업체인 비비안의 남상철(45.경기도 용인시) 영업부문 상무. 여심(女心)과 가장 가까운 일을 하고 있지만 집에선 '빵점 남편'일 것 같다는 게 부하 직원들의 평입니다.

그런 남상무가 아내 몰래 장보기 프로젝트에 도전했습니다. 요즘 대화가 크게 줄어든 아내 임연순(40)씨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랍니다. 2년 전 아내가 집 근처에 작은 가게를 열면서 서로 바빠 통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군요.

#40대의 저력을 보여주마

남상무가 쇼핑 장소로 고른 곳은 경기도 분당의 한 백화점입니다. '20여년간 영업을 하며 수천번 들락거린 백화점에서 40대의 연륜을 유감없이 보여주겠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1주일간 슬쩍슬쩍 찬장도 열어 보고 냉장고도 뒤지며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오후 6시 백화점 문을 들어선 남상무가 대뜸 컴퓨터 게임 코너로 향합니다. 힘들여 나왔으니 초등생 두 아이에게 뭔가 사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데 상무님, 착각하셨어요. 이거 선물 사기 프로젝트가 아니라 장보기 프로젝트란 말예요.

주방용품 매장을 지나치던 남상무가 아줌마들이 몰려 있는 곳에 눈길을 보냅니다. 판매 직원이 소리 높여 "5만9천원짜리 냄비 세트가 오늘 하루만 1만9천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판매원이 "이제 두 세트 남았습니다"라고 말하자 아줌마들이 웅성댑니다. 이때 잽싸게 냄비를 집어드는 남상무.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떨이 콩나물 판매대로 돌진하는 아줌마 못잖은 민첩함입니다.

지하 식품 매장에서 남상무가 수첩을 꺼내듭니다. 조미료.채소.과일 등 필요한 물건을 종류까지 나눠 꼼꼼히 정리해 놨군요. 결혼 후 단 한 번도 혼자 쇼핑을 안 해본 사람치곤 제법입니다.

몽고간장.다시마간장.물엿.주방세제 등 20대 남편은 생각해내기도 힘든 품목을 척척 집어듭니다. 잘 다듬어진 대파와 다진 마늘.생강, 사과, 행주, 비닐 랩 등도 골랐습니다.

남상무가 볶은깨 병을 들곤 뒷면을 유심히 살핍니다. 아, 원산지까지 확인하는 '경륜'을 발휘하는군요. 중국산 대신 국산을 사는 데 성공했습니다.

잘 나가던 남상무가 반찬 코너 앞에서 고민을 시작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떠오르지 않았던 거지요.

궁리 끝에 찾은 간장 게장 코너에서 점원 아줌마가 다시 남상무를 자극합니다. "좀 전에 어떤 아저씨가 '아내가 아파서 좋아하는 게장 사러 왔다'며 빈 반찬통을 가져왔어요. 너무 기특해서 꾹꾹 눌러 담아줬지요."

남상무가 씁쓸한 표정을 짓습니다. 지금껏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 하나 몰랐다는 것이 창피하고 미안했나 봅니다. 어쨌든 이제 가족에게 돌아갈 시간입니다.

#가족과 함께 장바구니 확인

집에 돌아와 경위를 설명하자 아이들은 게임 CD부터 챙겨들고 좋아하네요. 아내는 쇼핑 품목을 하나 하나 뜯어봅니다. 역시 아내에겐 당할 수가 없군요. 잘못 사온 물건이 꽤 됩니다.

의기양양하게 사온 국산 볶은깨는 냉동실 비닐 봉지 안에 가득 들어 있다는군요. 행주는 집에 10개가 넘게 있고 사과와 주방세제도 꽤 남았답니다. 비닐 랩은 너무 큰 걸 사서 여름에 수박 덮을 때나 써야겠다는군요. 간장을 두 병이나 사온 것은 좀 심했다는 평입니다.

흠을 잡으면서도 아내는 전혀 싫은 표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이 자못 대견한 듯합니다. 남편 역시 아내 역할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 것 같습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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