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임어당|차주환<중국문학·서울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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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6년 봄에 대만의 중앙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임어당 박사와 만나 오찬을 나누며 두어 시간동안 담소할 기회를 가졌다. 임씨는 그때 이미 7순이 넘었었으나 노쇠한 기색은 전연 찾아볼 수 없었고, 차분한 어조로 좌석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끌고 나갔다.
그는 한때「유머」대사로 불리기까지 한 사람이었으나 그 자신은 이야기하는 동안 별로 웃지는 않았다.
그는『생활의 발견』에서 그가 기독교 신자가 아님을 역설하였으나 내가 그를 만났을 때는「뉴요크」의 한 신교교회의 신자였다.
그 교회 목사의 기독교관에 마음이 끌려서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담배를 자주 피우지는 않았으나「파이프」는 노상 들고 있었다. 그의 담배철학은 변함이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후 70년「펜」대회 때 그를 다시 서울에서 만나 잠시 이야기를 했다.
임씨는 구미에서 교육을 받은 후 중국으로 돌아와 학자로 출발했으나 그는 구미문학의 소양과 중국문학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문제를 살려 수필가로 전환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32년에 반월간『논어』를 창간하여「유머」를 내걸고 소품문 전문지『자주풍』을 각각 창간하여 짙은 문인취미를 드러낸 소품문을 써냈다.
다만 그의「유머」소품은 재기가 종횡으로 펼쳐진데 비해 이렇다 할 내용이 별로 없어 자칫하면 웃기 위해 웃는데 그치는 경향으로 흘러, 당시 중국 수필문학을 주도하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그가「유머」들고 나온 것은 당시 국민정부의 사상 통합정책에 대한 자유주의자로서의 표현이었다.
임씨는 그러한 처지에서 중국어로의 수필문학 활동으로부터 다시 영어로의 문필활동으로 전환하였다. 결국 그것으로 세계적인 문인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평이하면서도 재치 있는 영어를 능란하게 구사해서 영어독자에게도 거의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의 문화를 자기 나름으로 해설 소개해서 그의 저술은 상당한 기간 계속 환영을 받았다.
그는 중국문화를 소개하는데 있어 서양문화의 독존적인 자세를 가볍게 풍자하는 듯한 투를 섞어 쓴 것이 오히려 그의 글을 널리 읽히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 고인의「유머」를 다시 접할 수는 없겠지만 명복을 비는 마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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