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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텔리폰」을 「득률풍」으로|주민들 화륜선보고『괴물』|두모포에 변찰소(경찰서)설치|1901년 경부선 철도부설공사에 때맞춰|「기모노」걸쳐입은 일본창녀들 상륙시작|1884년 장기∼부산간 해저전신 개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개항뒤 부산포의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일본의 문물이 부산포를 통해 전파되었다.
돛단배가 한가롭게 오가던 부산포앞바다에 검은 연기를 내뿜는 화륜선(화륜선)이 입항하자 부산사람들에게는 바람이 없어도 쏜살같이 달리는이 화륜선이 괴물로 보였다. 그저 양선(양선)이라고만 불렀다.
부산에 경찰서가 생긴것도 개항 직후의 일이다. 고종 13년(1876년)5월 일본천황을 만나고 온 수신사 김기수일행의 보고에 따라 일본제도를 본떠 두모포에「변찰소」를 설치, 도적을 다스렸다.
순사의 제복은 옛날 포도청의 나졸(나졸)같은 차림새였다. 순사가 요즘과 비슷하게 무명양복을 제복으로 입기는 갑오경장이후였다.
이해 11월에는 초량의 일본공관에 우편국이 개설돼 부산∼일본간 우편물 운반을 위해 낭화선이 월1회 운항했다. 이는 서울에 우정총국이 설치된것(고종21년)보다 8년이나 앞선다.
전신업무 역시 1884년 「나가사끼」(장기)∼부산간 해저전신이 개통됨으로써 부산에 먼저 상륙했다.
한성전보총국이 업무를 개시하기 전이었다.
부산에 전화가 개통된것은 1903년5월25일.
현부산전화국 부근에 일본의 전화교환소가 설치되고 1백30대의 전화가 개통되자 사람들은 「텔리폰」을 「득률풍」이라고 한역(한역)해 불렀다고 한다.
병원도 서울의 광혜원보다 10년 빨리 부산에 섰다. 현 동광동에 「관립제생원」이라는 간판을 단양의원(양의원)이 일본거류민의 진료를 맡았는데 가끔 우리 주민들도 이용할수 있었다.
김대상씨(47·근대사연구가)의 조사에 따르면 「관립제생원」이 개설된후 10개월동안 부산·동래지방 주민들 2천5백33명이 진료를 받았다는것.
가마니에 엽전을 가득넣어 지고 다니며 장사를 하던 때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제일은행 분점이 세워졌다.
(고종15년6월).
1892년 10월20일 부신 개항후 처음으로 큰불이 남빈정(현남포동)에서 났다. 행정(창선동)일대 까지 번진불로 가옥 50여채가 불타 3백명의 이재민을 냈다.
부산의 불은 벌써 개항과 더불어 기승을 떨쳤다.
그래서인지 1894년 부산에는 소방대가 생겨 수레에 수동식 「펌프」르 실은 소방차가 종을 요란스레 치며 다녔다.
부산에 최근의 우리학교가 생긴것도 이때다.
현 부산상업의 전신인 개성학교가 부산진 옛서당자리에 섰다. 첫해에 1백명의 학생이 모였다.
1901년 경부선철도부설공사가 시작되면서「기모노」자락을 펄럭이는 일본창녀들이 이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철도공사가 벌어지는 경부연도에는 으례 일본창녀들이 일본인 노무자를 상대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때쯤 부산의 일본 조계인 신창동·광복동부근에도 창녀들이 매춘영업을 했는데 1907년 8월 일본영사관은 유곽을 「미도리마찌」(현완월동)로 모두 옮기게 했다. 최근까지 윤락지대로 악명이 높았던 「부산완월동」의 역사는 이때 비롯된 것이다.
관부연락선이 등장한 것은 1904년. 일본은 동해도본선을 경부선에 연결시키기위해 연락선 「이끼마루」(일기환)를 부산∼하관사이에 취항시켰다.
14원78전이면 기차표 1장으로 서울∼동경간을 갈수 있었다.
이른바 「관부연락선」은 그후 일본유학생·학병·노무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눈물의 뱃길」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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