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스무니다" 12시간도 안 돼 뒤통수 친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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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26일 귀국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지지통신]

26일 오후 2시 일본 중의원 문부과학위원회에서 일본의 교육을 총괄하는 문부과학상과 야당 의원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네덜란드 헤이그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반갑스무니다”라고 인사한 지 11시간30분 만이다.

 ▶일본공산당 미야모토 다케시(宮本岳志) 의원=“(교과서 검정기준에 새로 포함된) ‘각의(내각회의) 결정이나 그 외의 방법에 의해 제시된 정부의 통일적 견해’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고노(河野) 담화나 무라야마(村山) 담화가 포함되나.”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상=“정부의 통일적 견해는 각의 결정 등을 통해 제시된 것을 가리킨다. 두 담화 자체는 각의 결정된 것이 아니다. 검정기준상의 정부의 통일적 견해엔 해당되지 않는다.”

 ▶미야모토=“놀라지 않을 수 없다. 총리가 ‘수정하지 않겠다’고 국제사회에 공약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가 안 들어간다니. 고노 담화는 너무나 중요하다. 최근 총리 보좌관이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새 담화를 발표하면 된다’고 말해 관방장관한테 주의를 받았다. 무라야마 담화는 외무성 홈페이지에 일본어와 함께 영어·중국어·한국어로도 게재돼 있다. 이게 정부 견해가 아니라면 누가 납득하나.”

 ▶시모무라=“사실관계를 말씀 드리는 거다. 각의 결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미야모토=“검정기준이 너무 자의적인 것 아닌가.”

 일본 정부는 지난 1월 교과서 검정기준에 ‘정부의 통일된 견해’를 새로 넣었다. “위안부는 법적으로 끝난 문제” 등 영토·역사 인식과 관련된 아베 정권의 입장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부과학상이 “고노 담화나 무라야마 담화는 각의 결정을 거치지 않아 정부의 통일적 견해가 아니다”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태도를 보여 야당 의원의 질책을 받은 것이다.

 대놓고 담화를 부정하거나 수정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모무라의 궁색한 답변은 일본 정부의 솔직한 생각을 대표한다. “고노 담화 수정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총리의 발언이 한·미·일 회담을 성사시키긴 했지만,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마음속으로부터 인정하긴 힘들다는 게 정권 핵심부의 정서다.

 앞서 23일에도 아베 총리의 ‘측근 중 측근’이라는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자민당 총재특보가 “고노 담화 검증 결과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새로운 담화를 발표하면 된다”며 아베 총리의 말을 뒤집어 파문을 낳았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자민당은 ‘국제정보검토위’라는 새 조직을 당내에 설치키로 했다. ‘한국과 중국이 미국 등 제3국에서 위안부·야스쿠니와 관련된 반일선전을 하고 있으니, 실태를 조사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조직 설치의 배경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4월 중순께로 예상되는 양국의 외교부 국장급 회담도 순탄하지 않을 전망이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은 27일 “한국은 위안부 문제만, 일본은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명)나 징용배상 문제도 함께 다루자는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에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거나 돈을 내놓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외무성 간부의 말도 전했다. 협의가 성사되더라도 4월 하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일본→한국 연속 방문을 앞두고 미국에 “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성의를 표시하는 이벤트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일 언론 “양국 정상회담 작업 서둘러야”=일본 주요 언론들은 27일 일제히 한·미·일 정상회담과 관련한 사설을 게재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양국 간 깊은 간극을 메우고 관계 개선을 진전시키는 것이 두 정상의 책임”이라며 “한·일 양국 정상회담의 실현을 위한 사전 정비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제안했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은 “한·미·일 정상회담은 미국의 주선으로 겨우 실현됐지만 또다시 미국에 기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며 “양국은 동아시아 지역 안정의 토대가 되는 관계를 스스로 조속히 구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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