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 「중앙문고」당선 문학논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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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그러면 우리는 모호하지만 실제 선취하고 있었던「한국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이해로서 이미 하나의 전체」라는 신념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완전무결하고 고정된 전체가 아니라「성장하는 전체」다.
이해는 존재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서 하나의 전체지만 미지의 것과 만나면서 거기에서 새로운 것을 파악하고 나면 그것까지 포함한(성장한)전체를 만들어 가게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 아래, 선취된「한국적인 것」의 이해를 구체적으로 포착, 발전시키기 위해서『현실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을」붙잡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로」확장해 나가는』철학적 인간 논의 해석원리를 하나의 방법으로 도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볼노흐,상기서 PP 110∼112참조)
이미 이해된 「한국적인 것」가운데서「티피컬」한 한가지 사실을 조심스럽게 선정하고 거기에 투영된 것의 깊이를 헤아리고 더불어 너비를 더해가는 소박한 노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티피컬」하다는 것은 이를테면『무릇 한국사상에서「중요하다고 생각되는」인간집단에 대한 관심』(이기백「현대한국사학의 방향」 문학과 지성 소년도 겨울호),『보편적 심미의식이라든지, 「내재하고 지속적」인 생명력등』(차하순, 상기논문),「러시아」의 속죄양의식이라든가 일본의 천황의식과 같은 『한국문학의 그 나름의「신성한것」』(김현,「한국문학사」서론)과 유사한 방법상의 관심대상이다.
「티피컬」한 현상의 포착은 물론 선제단(Pre-judgement)을 전제한 것으로서 과연 그것이 기타의 현상과의 상충을 극복하면서 종합된「한국적인 것」을 드러내어 줄 것인가 하는 불안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출발의 불확실성은 문제전개의 개방성의 한 조건이다. 하나의 부분을 붙잡게되면 다른 부분들과의 연결에 대한 실마리가 일단 준비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미 붙잡은 것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에 대한 부단하고 연쇄적인 연구의 전개가 가능해진다.
이는 결정적인 기점을 떠나 일회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여하한 방법도 차단되어 있다는 의식이며 역사의 어떠한 요소에 대해서도 우리의 관심을 개방한다는 관용이기도 하다.

<5, 예…「기다림」>
시인 한용운이 세련된 시의기법을 익히지 못했다는 것은「그럼에도 불구하고」왜 그의 시가 감동적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유도한다.
한용운은 혁명시인으로(송욱),시민문학의 한 전통으로(백악청) ,승화된 개인의식 또는 역사의식의 승리로(김현),불교적 낭만의식의 발현으로(윤재근)등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와 찬사를 받는 행운을 누려왔다.
여기에다 드물게 비판적인 측면에서 조명을 던진 사람은 김윤식이었다.(「문화수용과 사상」,근대한국문학연구수록논문)그는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여 한용운의「타고르」에 대해 가졌던 오해와 「눌변」으로 지침 된 그의 시가 지니는 한계, 실제 이상으로 평가를 받게한 비시적 배경 등을 철두철미 규명하고 있다. 민족구제자로서의 한용운의 위대성에서 그의 시의 위대성을 연역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김구식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만해의 시는 민족의식이라는 당시의 한국적 상황, 그 시대성을 뛰어넘을 수가 없는 특수성에 그치고 말았다』는 그의 해석은 논의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는 따라서 특수성이라는 한국적 상황이 소멸할 때 「님의 침묵」의 의미도 상당히 설질하게 되며, 그것이 한용운 자신이 「님의 침묵」의 세계를 더욱 발전시키지 못한 원인일 것이라고 보고 있으나 기왕 입장피구속성(Standortgebundenheit) 을 인정한다면 그 구속성을「당시」로 제한하지 말고 좀더 넓게 역사적 기반에서 찾을 수는 없었을까.
그렇지 않고서는 당시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 현재까지에 있어서도 한용운의 시가 감동을 일으키는 부분을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처럼 한용운의 시는「타고르」의 역시와 관련이 있을, 더듬거리고 서투른 사랑의 고백들이다.
이러한 기법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감동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이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버린 반일적 민족의식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우렁찬 혁명가의 목소리1「피문능= 기대」「황금의 칼」「강직의 방패」 따위의 어휘는「님의 침묵」의 기조적인 언어도 아닐 뿐더러 (그의 시집을 연작으로 읽을 때는 더욱) 시의 분위기를 어색하고 생경하게 조차 만드는 것이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서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있읍니다.
②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한편의 시(오서요)에서 이두가지 분위기가 주는 위화를 해소시킬 수 있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결국 한용운의 시의 감동은 「님의 침묵」에 일관된 주제,「기다림」의 감동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기다림」은 그의 시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주제다.
이러한 주제의 비중에서 감동의 부피를 찾는 것은 또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추론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가한국인의 보편적 감동을 담고있다면 그것은「기다림」이 우리 민족의 면면한 주제의 하나이마, 한용운이「님」을「기다리는 님」으로 파악했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님」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 민족의「님」은「떠나간 님」이었다.「행단인」에서「진달래꽃」에 이르는「님」의 모습은 그것이 어떠한 애정의 말로써 그려져 있다 할지라도 「원망스러운 님」이었고 그래서「님」을 부르는 것은 결핍된 것에 대한 자기보상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이 이성적인 것(또는 혈육)이든 이념적인 것(임금 또는 궤국) 이든 「원망스러움」과 더불어 「님」이 현시 되었다는 사실은 「님」을 「기다림」곧 이별이라는 조건 속에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영소인」 과 「초혼」사이, 「헌화가」와 「진달래꽃」사이에 과연 진정한 의미의 내적거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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