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송상일-「한국적인 것」의 순환적 이해-문학에 있어서의 한 방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 서>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전통 문화의 구제를 위해서 소박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누가 만일 일정한 대상을 두고 「한국적」이라고 부른다면 「적」이라는 한정어가 지니는 분위기로 인하여 그는 마치 포괄적이고 전형적인 「한국적인 것」을 전제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한 걸음 후퇴해 보아도 어떤 원천적인 「한국적인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한국적인 것」은 우리의 정서 가운데 짙은 농도의 분위기로 존재하고 간혹 구체적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청자로 대표되는 「한국적」선 따위-막상 그 보재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없으면서도 있는 것』(박종홍), 그래서 있으면서도 없는「소피스틱」한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문화적인 집적을 전통 문화로 보지 않는 한, 「한국적인 것」은 엄연한 맥락으로 존재해야만 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발굴해 냄으로서 비로소 「전통과 개성」따위의 근본적인 논의가 발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적인 것」의 발견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에 성실히 대답하려면 문화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나 필자로서는(능력과 관심의 한계 때문에) 문학의 경우로 제한하여 살필 수밖에 없겠다.
그나마 방법을 제시하는 정도의 서설 적인 성격에서 크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고충을 느끼면서도, 문제 비중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아 요약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①한국 문학의 발생학적 이해의 비판 ②「한국적인 것」의 포기·보편화에 대한 반성 ③순환적 이해의 방법제시 ④예시…「기다림」의 경우 ⑥결론·전통의 창조.

<2, 원형에 대한 물음>
(1)「한국적인 것」에 접근하려는 가장 소박한 노력으로 시간적인 발단, 다시 말해서 「발생」을 소급 규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문화에 혼입된 일체의 외래적인 것을 제거해 나간다면 끝내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한국적인 것」이 나타날 것이라는 논리적 기대에서다.
국문학이 지니는 여러 가지 성격은 작품에 의해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고 아득한 작품 이전시대부터 간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전규태, 『한국 고전 문학의 이해』P·81).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식의 공법, 발생학적인 연구는 불확실하거나 무의미하다.
경험론자들이 상정했던 발생적인 기점이 「타블라·라사」(백지)와 같은 의미 이전의 상태에 불과했듯이 「한국적인 것」이 시간적 발단에서부터 전체적으로 이미 획득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은 무모한 발상이다. 「볼노흐」는 말한다.
아무리 멀리 되돌아보아도 우리는 「언제나 이미」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끝내 그것은 희미한 어린 시절의 어둠 속에서 상실되고 만다.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서울 강연, 『현대철학의 전망』 P·73).
설사 가정적으로 전혀 순수한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텅 빈「포름」(FORM)에 불과할 것이다. 구체적인 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더불어 문화의 내용을 희생한다는 전제 아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인식은 존재에 대한 것이지 생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는 「플라톤」의 명제가 새로워진다.
실로 생득적 문화, 일정 불변한 문화의 고유성이란 문화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형성된다는 사실을 무시한 비역사적인 편견이다(차하순, 『고유문화와 보편문화』 세대 74년도 1월호). 또 일체의 외래적인 것을 배제한다는 것은 자기를 객관화함으로써 개방하지 못하는 피해 의식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전통 문화의 옹호라는 합리화된 전제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으로 인한 폐쇄성은 결과적으로 문화의 고립 내지 위축을 초래하게 된다.
이상의 반성에서「한국적인 것」의 발견은 그 방법과 결론이 어떠한 것이든지 문화 자체를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하나의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일원적 발전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문화 이해의 일반적인 요청과도 동일한 것이다.
(2)그러나 아직도 기원적인 것에 대한 유력한 연구방법으로 군림하고 있는「원형 비평」을 살피고 건너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때 기원은 시간적 발단이라는 의미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다. 「Archetype」는 시작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포괄적이고 항구적인 기저라는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프로이트」이후 일종의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심리의 심층, 특히 꿈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들은 무의식의 영역이 고대인의 정서·경험 형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융」의 집단무의식에 이르면, 꿈은 민족의 집단적인 꿈-유전적인 반응 유형을 재구성 할 수 있는 근거로 여겨졌다. 알려진 대로「융」의 집단 무의식은 「원형」이라는 용어를 포함하여 원형비평에 절대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원형비평은「Mythopoeic Criticism」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체험의 외래된 기본적「패턴」으로서의 원형을 집단의 꿈, 신화 속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원형비평의 방법이 「한국적인 것」의 발견을 위해 원용필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초 원형비평은 신화 속에서 원형을 추출, 설정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작품을 분석하는 작업으로 신화 자체의 개별성을 발견하려는 이론이 아니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원형 비평은 구체적인 작품분석에 있어서도 내려다보는 위치를 지나치게 높게 잡음으로써 근본적이고 일반적으로 설정된「패턴」속으로 작품의 개성을 흡수해 버릴 위험성이 지적되고 있거니와(M.Krieger 「The play and place of criticism」P·24) 모든 신화를 원 신화 urmyth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 있다(신동욱, 서『신화 비평론 서론』 예술원 논문집 제14집 P·10). 「그리스·로마」신화와 한국의 민담에서. 상사한「통과」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우리가 목적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인 것」의 발견노력은 또 하나의 조건으로서 보편화의 위험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