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만가는 부조리와 모순 용서하는 생활로 씻어가자|지원상 목사<「루터」교 서울중앙교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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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새해를 맞으면 금년 1년은 좀더 건실한 생활신조를 가지고 보람있는 생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된 생각인 것 같다.
선하게 살자, 의롭게 살자, 참되게 살자, 배우며 살자 이렇게 꼽는다면 한이 없다.
나는 『금년 한해는 용서하며 살자』라고 해보고 싶다. 사실 모든 부조리나 사회의 모순은 인간이 용서하지 않는데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용서」란 말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로 용서는 「잊는 것이다」라고 본다. 「이마누엘·칸트」는 『나는 잊어버리는 은혜를 가지지 않은 사람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특히 이웃의 잘못을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기억하고 사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개중에는 남의 허물이나 잘못이나 실수한 점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의 허물이나 과오는 즉시 잊어버린다.
이것은 올바른 생의 태도가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자기의 과오나 잘못은 언제나 기억하고 참회하며 살고 남의 장점이나 잘한 일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교훈이며 성실한 「크리스천」들의 바른 생활 태도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박해자들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 일이 있다. 얼마나 거룩하고 참된 생활이었는가.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용서란 이해라고 보는 견해다. 이 이해란 말은 넓은 아량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작은 일에 짜증을 내고 싸우려고 대드는 사람이 있다. 아니, 어느 학자가 지적했듯이 현대인은 다「노이로제」에 걸려서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신경질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넓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문제삼거나, 높은 차원에서 본다면 다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극한적인 싸움을 벌이는 따위의 일은 우리생활에서 흔히 있는 일들이다.
우리 주변을 살펴볼 때 이런 살벌한 분위기를 자주 의식하게 된다. 더구나 종교인사회에서까지도 그런 일이 있음을 볼 때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 적어도 종교인이라면 좀더 높은데 뜻을 두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며 이해하고 용서하는 아량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한번은「예수」님에게 사람들이 간음한다고 현장에서 잡은 여인을 끌고 왔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모세」의 율법대로 하면 이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리이까』고 질문했다.
그때에「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좁고 편협된 마음을 아시고 침묵을 지키시다가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쳐라』고 말했다. 아무도 치는 사람이 없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용서하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교훈 하셨다. 그의 깊은 이해와 넓은 아량을 다시 한번 절감케 하는 성경 귀절이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용서란 곧 「사랑」이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참다운 용서란 불가능한 것이다. 사랑할 때에 모든 허물이 가리워 지며 좋은 것으로 보여진다. 반대로 미워할 때 좋은 것도. 나쁘게, 옳은 것도 그르게 보여진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할 때에 그것은 그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살 때 다툼도·시기도·싸움도 그 밖의 온갖 부조리가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참다운 사랑은 제한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네 형제가 하루 입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잘못했다고 하면 너는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사랑, 이같은 용서를 「예수·그리스도」의 생활 속에서 실감 있게 배울 수 있다. 이 한해의 생활이 용서하는 생활이 될 때 우리의 가정과 사회가 좀 더 명랑하고 아름답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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