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의미…「함께 산다」는 인정이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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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연례 행사로만 끝날 수 있나>
해마다 세모를 앞둔 이맘때가 되면 유행풍처럼 이웃을 생각하자는 「캠페인」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캠페인」은 늘 시작됐는가 싶으면 바뀌는 해(연)와 더불어 사라져가고 언제「캠페인」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개인주의가 사람들 마음속을 침범한다.
서구문명의 이입과 함께 동양에 수입된 서양문명의 산물인 개인주의는 요즘 반갑지 않게도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너무 팽배해있다. 「나만 알고 남은 모르겠다」는 관념들이 강해 우리 전통사회의 철학이었던 「우리」라는 연대의식은 이제 팽개쳐진지 오래고 이웃을 아끼거나 생각하는 것은 케케묵은 관념으로까지 치부되고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 「나와 너」라는 연대의식은 낡고 낡은 구 세기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지는 분명 않다.
서양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역사학자 「토인비」가 오늘날의 비인간적이고 기계문명만 부풀대로 부푼 서구사회는 이제 동양의 도덕주의를 채택해야만 구제 받을 수 있다고 역설한 것은 가장 적절한 반증의 예인 것이다.
서양의 「휴머니티」니, 기독교적 자선정신 혹은 인도주의 나를 들먹일 일체의 필요 없이 나 아닌 이웃을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온 동양의 철학개념이다. 불과 20∼30년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면면히 흘러온 이 개념에 따라 남을 생각하고 위하며 살아왔다. 학우에게 점심값을 털어 주고, 다급한 수업료를 빌려주는 일은 베푸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모두「고맙네」한마디로 맺어지는 자연스런 일이었지, 「얼마 손해 봤어」식의 야박한 계산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대의식은 우리고유철학>
서양의 자선이 베푸는 쪽은 베풀었다는 건방진 자기만족감을 받는 쪽은 받았다는 비굴감을 일견 풍기는데 비해 동양의 연대의식은 「함께 산다」는 인정에 뿌리를 박고있다.
「함께 산다」는 이 인정은 동양에서 사회윤리인 도덕의 줄거리를 이루었고 또 법으로도 규제한 사항이다.
정치가중 제1인자로 『시경』에 찬미되어 있는 주문 왕은 바로 석이나 덕과 통하는 「선정」으로 이름난 사람인 것이다. 환난을 당했을 때 서로 돕는 일(상휼)은 아름다운 예속이었을 뿐 아니라 지켜지지 않을 때는 부휼지형이라 하여 8형 중 하나로 볼기를 때려 다스려진 의무기도 했다.
바로 옆 사람이 당장의 의·식·주 해결을 못하고 굶어 가는데도 눈 깜짝 안하는 이기주의는 참으로 참담한 인간부재 현상이다. 이제 원래 우리 고유의 철학인 연대의식을 되살릴 판이다.

<성공거둔 율곡의 향약 운동>
연대의식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따스한 근본윤리여서 「캠페인」으로 우리 모두가 쉽사리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율곡 선생은 몇 백년 전에 이미 향약이라는 마을 단위의 「길드」(조합)를 만들어 이웃 생각하기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벌인 전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의무와 권리 모두를 개인단위로 부과하는 서양식의 개인주의 민주주의는 18세기 「루소」의 자연회귀운동으로 시발된 것이지만 인간행복을 부르짖은 「루소」가 현대에 살아있다면 인간이 물질에 위축되어 날로 불행해지는 현대를 전적으로 반대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토인비」가 경고한 서구사회의 위기를 맞기 전에 다시 우리는 연대의식을 부활시켜 이웃을 생각하며 함께 살 필요가 있다. 【조용욱<동덕여대학장·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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