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등산 5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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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27년 본 서울에서 제일 높다는 북한산 백운대(해발836m)에 올라갔다.
지금의 백운대는 누구나 쉽게 오르는 서울근교의 명산이라고 알고있지만 이때의 등산은 내가 산다운 산의 정상을 정복한 최초의 경험이었고 평생을 산악운동에 바치게 만든 계기가 된것이다.
이때 나는 보통학교(국민학교)5학년 시절로 나이 불과 11세이었다. 대구에서 살다가 관직을 정년 퇴직한 아버지를 따라 고향인 서울로 이사온해였다.
어머니께서 전부터 불공을 드려오던 「도수가람」 (도선사가감=지금의 도선사)에 가야겠다고해서 따라 나선 것이다.
사진관을 경영하는 사촌형(이학정씨)을 앞세우고 창동까지 기차로 간후 우이동에서 짐꾼을 사가지고 도수사로 올라갔다.
절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불공을 드리고 이튿날 백운대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때 서울와서 들은 얘기가 『서울삼각산 (북한산) 꼭대기가 제일 높은데 모두 한번 가보기로 소원하지만 워낙 험해서 여간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해 봄에 백운대의 가파른 암벽에 처음으로 계단과 쇠난간이 만들어져 이로 인해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이튿날 어머니·사촌형과 함께 도선사뒷길로 해서 숲길이 지루하고 급한 족두리고개와 위문을 거쳐 엉기다시피하여 삼각산꼭대기라는 백운대를 올라갔다.
지금의 백운산장자리에 이르자 옛날에 절이 있었던지 무너진 축대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허술한 바람막이를 쳐놓은 바위굴로 기억하는데 사람이 있어 반기면서 친절히 길을 가르켜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분이 이해문씨(1872∼1947년)로 지금의 산장주인인 이영구군의 조부였다. 사람이 무척 반가운 듯 깡마른 얼굴에 하나 가득 웃음을 담은 50대의 이씨는『몸이 약해서 봄·가을·여름 이곳에서 3,4년 동안 살고있다』고 했다.
험난한 백운대는 과연 계단과 난간으로 등산로를 만들어놓아 생각보다는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높은 바위벼랑을 밑에서 쳐다볼땐 간담이 서늘해져 잔뜩 겁이 났던 것이다.
그리고 효자동에서 왔다는 청년6, 7명이 먼저 오르고 있어 안심이 되었다.
이때 나와 사촌형은 학교제복에 운동화를, 어머니는 치마·저고리차림에 흰 고무신을 신었다. 그런데 앞서가는 청년들은 대부분 허름한 양복에 「지까다비」(일본의 버선신)로 발을동여매고 역시 운동화를 신었는데 유독 한사람은 바지저고리에 「나까으리」(중절모)를 쓰고 있었던것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그들은 또 도시락과 과일등을 싼 보따리를 몇 사람은 등에. 몇 사람은 허리에 각각 차고있었고 나무가지를 꺾어만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오늘날 화려한 「배낭」과 「스틱」의 50년전 모습인 것이다.
나중에 이해문씨의 얘기와 신문의 소개로 알았지만 이 백운대 등산길의 계단·난간공사는1926년 10월 재산가인 한상룡씨와 식산은행(지금의산은)의 일본인두취 화전일낭등 한·일재계 인사들이 발의, 각계인사 1백9명이 내놓은 찬조금 1천9백원으로 그 이듬해 3월에 착공하여 중국인 석공이 약 석달걸려 준공했다.
그때 총독부기관지인 경성일보사 주최로 50명 정도를 공무하여 준공기념 백운대탐승회를 개최, 이 회원들이 준공식에도 참석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회원공모에 의한 「그룹」등반으로서 한국최초가 아닌가한다. 이 탐승회는 수년간 봄·가을에 열러 등산대중화의 계기가 되었다.
내가 등반한 것은 이 준공일의 열흘쯤후.
정상에 올라서 삼각산의 웅장한 아름다움에 놀라고 감동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구에 살때 불공드리는 어머니 따라 「아지랭이」산에 다닐때부터 어린 가슴속에 싹트던 산을 향한 정열은 이날 백운대 정상의 바위를 끌어안으면서 완전히 나의 혼백을 불태웠다.
그해 가을 나는 사촌형을 졸라서 전대에다 도시락을 싸매고 효자동에서부터 출발, 자하문고개를 넘고 문수암을 거쳐 다시 백운대를 올랐다.
그후에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틈만나면 올라갔으며 한번은 인수봉에서 서양인선교사들이 밧줄에 매달려 암벽등반을 하는것을 보고 난생 처음 「록·클라이밍」을 목격-신기하고 부러움에 며칠토록 밤잠을 설쳤다.
그러다가 고보1학년 (중학1년) 때 마침내 사촌형과 더불어 무시무시하고도 흥미진진한 인회봉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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